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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막으려고 쌓은 방답진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C020102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종길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방답진전라좌수영의 전초 기지로서 왜구가 다니는 길목이며 바다 방비의 요충지이다. 1522년(중종 17)에 축성을 시작하였다. 성은 석성으로서 길이가 694보(1587.525m)이고, 높이는 19척(6.27m)이며, 성의 마디인 여장은 205개소가 있다.

성문은 남문인 영남루를 비롯해 서문, 동문 등 3개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알 수 있다. 성터는 현재 돌산읍 소재지 동내마을에서 돌산초등학교신복리 방면에 위치한 동령곡, 북쪽으로 서당산 중턱을 따라 돌산읍사무소 뒷산 중턱에 이른다.

현재 성곽은 ① 동문 기단석 일부, ② 군내교회 뒷산 중턱 기단석 일부, ③ 동문 북쪽 기단석 일부, ④ 군내리 277번지 정태현 댁의 서문 북쪽 기단석 일부, ⑤ 군내리 562번지 윤계배 댁 남문 왼쪽 성곽 일부, ⑥ 군내리 475번지 우명주 댁 남문 왼쪽 성곽 일부, ⑦ 군내리 554번지 김태웅 댁 남문 오른쪽 성곽 일부, ⑧ 박종문 댁에서 길로 쓰고 있는 남문 오른쪽 성곽 일부, ⑨ 군내리 422번지 고종빈 댁 서문 남쪽 성곽 일부, ⑩ 군내리 939번지 박성식 댁에 높이 6m 이상 거의 원형에 가까운 서문 남쪽 성곽 일부, ⑪ 서문 남쪽 도금터로 넘어가는 곳에 성의 기단석, ⑫ 군내리 476번지 나계순 댁에 남문(영남루) 주춧돌이 남아 있다.

성내외에는 외지에서 온 관원들을 대접하여 묶게 하였던 객사, 방군들이 기거하는 위사, 성안에서 적과 싸우기에 알맞게 만들어 놓은 어변정(禦邊亭), 흉년에 백성을 구하여 주기 위한 곡식 저장 창고인 진휼창(賑恤倉), 방군들의 식당인 군사고, 포탄이나 화약을 보관하는 화약고, 무기를 보관하는 병고, 유사시 물품을 보관하였던 유군기고(留軍器庫), 수군 병참물을 보관하였던 수군기고(水軍器庫) 등이 있었다.

첨사가 공사를 처리하던 동헌 터는 현재 군내리 353-1번지[돌산로 1253-6] 돌산읍사무소 뒤에 있는 옛 건물이고, 그 뒤편에 관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10칸짜리 객사는 돌산우체국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72년 2월 22일 화재로 소실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우체국이 들어서 있다. 첨사의 음식을 장만하던 군관청이 1989년 복원되었고, 1999년에 보수되었다. 군내리 476-1번지[남외길 10] 나충현 댁 당구장 자리에 성안에 물을 공급하고 말을 먹였던 연못이 있었다.

방답진의 관원으로는 당상 종3품인 첨사(僉事) 1원과 요원 705명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군 장교인 군관이 50명, 기와 방패를 든 기패관(旗牌官)이 25명, 민심을 진정시키는 진무(鎭撫)가 45명, 관인을 보관 날인하는 지인(知印)이 25명, 전선의 노를 손보는 군로(軍櫓)가 25명, 기로 부대를 나타내고 통신하는 기수(旗手)가 50명, 관청에서 심부름하는 사령(使令)이 25명, 대포 기술관인 화포장(火砲匠)이 22명, 대포를 쏘는 포수(砲手)가 68명, 배 키 운전에 능통한 타공이장병(舵工耳匠屛)이 18명, 노를 젓는 능로군(能櫓軍)이 302명, 국방에 힘쓰는 방군(防軍)이 1,620명으로 총 2,981명이었다. 이를 보아 방답진은 그 규모가 매우 큰 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답진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고문헌이 여럿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병조판서 장순손이 아뢰기를 ‘미조항·방답·가리포 등에 이미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긴요한 방어지입니다. 그러므로 관원을 보내어 적간하도록 하거나 유시를 내려야만 그 도에서 반드시 변방을 중시한다는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마도주의 요청을 다 들어줄 수 없어 변방의 환란이 염려스러우니 남쪽 지방의 방어를 더욱 신중히 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농사철에 관원을 보냄은 불가할 듯하니 유시를 내림이 가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1531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관방 조에는 “방답진순천부에서 동쪽으로 170리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금상 10년 적(왜구)이 쳐들어오는 중요한 곳에 설치하고 첨사 1명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1618년 편찬된 『승평지(昇平志)』 관방 조에는 “방답진중종대왕 때 적이 쳐들어오는 중요한 곳에 설치하고 첨사 1명을 두었다.”고 적혀 있다.

1759년 간행된 『여지도서』 진보 조에는 “방답진순천부로부터 동쪽으로 150리 거리에 있는데, 성은 길이는 694척, 높이 10척, 여첩 387개, 성내 우물 7개가 있다. 중종대왕 때 적이 쳐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설치했으며, 무반 정3품 첨사를 두고, 군관 32명, 기패관 18명, 진무 20명, 지인 9명, 사령 24명, 군뇌(軍牢) 39명, 기수 36명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1864년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조에는 “방답진순천부로부터 120리 떨어져 있는 돌산도 가운데 있으며, 전라좌수영에서는 동남쪽 4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중종 18년 적이 쳐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창고가 2개이며, 수군첨절제사 1명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정미년에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답진성에 대해서는 「방답진지도」를 통해 대략적인 개황을 파악할 수 있다. 성벽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쌓아졌다. 북쪽은 천왕산에서 내려오는 줄기와 연결되며, 남쪽과 서쪽은 가막만과 접하고 있다. 성문은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1개소씩 세 군데가 있으며, 성내에는 군관청과 동헌, 객사 등 여러 건물이 보이고, 서문 밖으로는 굴강과 병선 등이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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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답진 지도

방답진성군내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낮은 구릉이 있어 체성은 이곳을 기점으로 사각형 모양으로 쌓아졌다. 동벽·서벽·북벽은 구릉의 사면을 이용하고 있어 약간의 경사를 갖고 있으나 남벽은 바다와 접한 평탄면으로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방답진성은 남벽이 위치한 곳에 민가가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체성의 흔적이 잘 보전되고 있다.

성벽의 길이는 동벽 204m, 서벽 295m, 남벽 388m, 북벽 308m로 총길이는 1,195m이다. 쌓는 방법은 외벽은 돌로 쌓아 올리고 그 뒤쪽으로 잡석과 흙을 채워 넣은 내탁식이다. 이는 조선시대 읍성이나 진성을 쌓을 때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이다.

서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외벽을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4m 이상 견고하게 쌓고, 내벽은 1차 가공 석재를 이용하여 쌓았다. 이 구간은 내외벽을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협축(夾築)의 방법으로 쌓고 있다. 전반적으로 외벽은 굵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고 안쪽은 깬돌을 채워 넣은 편축식이지만 서벽과 동벽 일부 구간에서 협축으로 쌓은 모습이 보인다. 협축으로 쌓은 부분은 모두 외부와 연결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평지로, 성벽을 견고히 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벽의 중간 지점에서는 서문지가 확인되며, 외벽의 높이가 350㎝ 되는 지점에서 미석이 확인된다. 또한 체성의 하단부에서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문지는 동·서·남의 3개 지역에서 확인된다. 세 곳 모두 현재 군내리에서 외부로 통하는 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문지의 너비도 세 곳 모두 6~7m 크기이다. 동문과 남문에서는 문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110×100㎝의 초석이 확인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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