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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역사 - 애양원의 모태(광주에서의 활동)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D010101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무성

광주부 효천면에서 시작된 애양원의 역사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04년 2월 목포선교부에서 광주선교부를 개설하기로 하고 벨 목사와 오기연 목사를 파송하였다. 1904년 12월 15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사택 건축이 완료되었고, 1904년 12월 21일에 이사하게 되었다.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크리스마스 예배를 시작으로 광주 선교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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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전경

목사이자 의사인 오웬(Clement C. Owen)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인 능주·남평·화순·보성·강진·순천·여수·장흥 등을 책임 맡아 선교 활동에 전념했다. 오웬이 선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중 1909년 4월 3일 급성 폐렴으로 순교하였다.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의사가 오웬의 폐렴 소식을 듣고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광주로 급히 오다가 20여 킬로미터쯤 남은 남평과 광주 금당산 사이 길가에 누워 있는 여자 한센병 환자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포사이트는 그 여자를 안아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왔다.

1908년 3월에 부임하여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우월순이라는 한국 이름의 미국인 선교사 윌슨(Robert M. Wilson)과 최흥종 목사가 1909년 광주부 효천면 봉선리에 한센병 환자 치료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치료소 입원실에서 이 한센병 여인을 치료하려 했으나 동료 입원 환자들의 반발로 쫓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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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선교사

선교사들은 사택 건축용 벽돌을 굽던 가마터를 치우고 그곳에 환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오웬 의사가 사용하던 침대와 침구를 사용하고, 선교사들과 양림리교회 교우들이 수시로 방문하여 치료를 도왔다. 그러나 이 병자는 쾌유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수 주일 후에 죽었다.

그때 이 여인에 대해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던 광경을 지켜보았던 윌슨이 1909년 여름 인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짓고 한센병 환자 20여 명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후 최흥종 목사가 제공한 1,000평의 땅에 4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출발하였으나 환자가 점차 늘어갔다. 이에 윌슨과 제중원 사무원 최흥종과 이만준 등이 3년간 전도를 해서 1912년 영국 에딘버러에 있는 영국한센병환자협의회로부터 2천 달러를 받아 한센병 환자 수용소와 진료소, 교회 등을 마련하게 되었다.

1916년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 환자 수는 날마다 늘어나 1924년에는 56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1924년부터 광주한센병수용소를 순천으로 옮기려는 준비가 진행되었다. 이때 광주에서 한센병구제회를 설립하여 모금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것에 비하여 많이 거두어지지 않았다. 당시 상황이 모금하기에는 적합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문둥병으로 불린 한센병 환자들을 일반인들은 인간 이하로 멸시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기대 이하이기는 하였지만 모금을 계기로 한센병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였다. 외국인 특히 서양인에 대한 배척 분위기는 점차로 우호적인 형태로 전환되었다. 당시 아무도 관심도 갖지 않았던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 외국인 선교사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킴과 아울러 매우 긍정적으로 외국인들을 접근하게 되었다. 가족들까지도 돌보기를 거부하였던 한센병 환자들에게 외국인 선교사들은 절대적인 도움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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