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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발전의 밑거름이 된 3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D010107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무성

애양원이라는 한센병 집단 치료소는 병을 고치는 공간인 동시에 한센병 환우들의 삶과 눈물,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는 곳이다. 대다수의 한센병 환자들은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이 있고 더 나아가서 사회로부터 멸시당하는 고통이 있었다. 심적인 아픔은 육체적 아픔보다도 더 컸으며 이로 인한 영적인 왜곡은 심각한 병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우월순 의사는 영적인 치유를 위하여 애양원을 운영하였으며, 엉거(James Kelly Unger) 목사, 김응규 목사, 손양원 목사 등 3인은 애양원 발전의 초석이 된 인물들이다. 엉거 목사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교육 선교사로서 가장 좋은 학문적인 배경을 갖추었다.

엉거 목사는 광주선교부에 배속되어 있는 기간에 우월순의 한센병 치료에 큰 관심을 보였다. 광주한센병수용소를 애양원으로 옮겨야 할 즈음에 미국으로 가서 자금을 모금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7년 환자들이 애양원으로 집단 이주한 후에는 애양원교회 담임목사를 자진하여 맡는 등 한센병 환자들의 재생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김응규 목사는 우월순이 애양원교회에 한국인 목사를 청빙하려는 계획을 좇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었으며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있었다.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대처 방안으로 1929년 김응규 목사가 광주에서 여수로 거처를 옮겨 애양원의 터를 다지는 데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응규 목사는 애양원교회에 부임 이래로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선교사들과 한센병 환자들로부터 좋은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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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규 목사

우월순도 김응규 목사가 한센병 환자들과 관련된 일에 큰 의욕을 갖고 있다면서 기대를 많이 하였다. 김응규 목사는 이후 우월순 원장과 함께 한센병 환자들의 삶에 영적인 치료와 육적인 치료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여 현장에서 적용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1938년에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지지 발언을 하는 등 역사적으로 큰 오점을 남겼다.

또 한 명의 한국인 목사로 손양원이 있다. 당시 전도사인 손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의 환영 속에 1939년에 애양원에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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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

손양원의 감화력 있는 설교와 신행일치의 행보들이 당시 어려움에 처한 애양원 구성원들의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애양원에는 일반인들이 한센병 환자들이 거처하는 공간 출입을 꺼리는 분위기이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감염이나 악취에 개의치 않고 모든 환자들의 처소를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애양원에서의 활동은 거꾸로 사는 삶의 실천이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보여 준 자신을 버리는 삶을 실천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허물었으며 이로써 한센병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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