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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 순교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D020102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무성

손양원(孫良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1919년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0년 부친이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1920년 일본 츠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에 다시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으며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부산 감만동 나환자 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함안이 속한 경남노회에 목사 임직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 연유로 1939년 8월 22일 전라남도에 위치한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였다.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 후 일본이 강요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해 종신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와 경성구치소, 청주보호관찰소 등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여 애양원교회로 돌아와 재활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사회가 혼란하던 1948년 여순 사건 때 큰아들과 둘째아들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여수가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인 1950년 9월 13일 인민군에 의해 잡혔다가 9월 28일 미평에 있는 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어려움을 같이 하면서 신행일치의 삶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당시 김수남 권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목사님이 설교한 대로 실천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참 목사로 인정하고 모시기 시작하였다. 목사님도 ‘위대한 사람도 당대에는 모르고 지난 다음에야 안다.’고 하셨다. 목사님의 가름침도 신령하였으며, 부산에서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가지고 설교하셨는데 이로 인하여 일부 지역에서 거부를 당하기도 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철저하게 예수의 삶을 현장에서 실천하였다. 수감되어 있던 시기에도 현장의 간수들까지 이웃으로 껴안음으로써 자신의 목사로서의 특권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애양원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손양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여 그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에서는 1948년 10월 21일 여순 사건 때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장자 손동인, 차자 손동신, 1950년 9월 28일 순교한 손양원 목사, 조상학 목사, 덕양교회 지한영 강도사와 아들 지준철, 윤형숙 전도사, 제일교회 허상용 집사, 돌산읍교회 황도백 집사, 남면 우황리교회 곽은진 집사, 안경수, 백인수 등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을 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

손양원 목사 순교 유적지를 방문할 때 꼭 가보아야 할 곳이 애양원이다. 대개 촉박한 시간에 들러서 기념관만 가볍게 들른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방문해서 애양원 곳곳에 스며 있는 역사성을 살펴보아야 단순히 기독교인들만 추앙하는 종교 성지로서가 아닌 참 사랑을 현장에서 실천한 인간 손양원 순교자의 신앙의 의미를 느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