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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사들(최흥종 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D030101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무성

소설가 문순태가 쓴 『성자의 지팡이』는 무등산 속 오두막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단식 중인 최흥종[1880~1966] 목사를 대학교 2학년생 손자 최협이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최협 교수가 눈 쌓인 무등산이 펼쳐진 연구실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회고한 것을 소설화한 것이다.

최흥종은 젊은 시절 ‘망치’란 이름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아래서 크다가 열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계모 보란 듯이 사람을 개 패듯 패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열한 살이나 어린데도 늘 형을 챙겨 주던 배다른 동생 최영욱이 “성님은 사람 때리는 게 재미있어?”라고 안타까운 듯 물었다. 훗날 의사가 되어 최흥종이 설립한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자식 9남매까지 대신 보살펴 준 동생이었다.

그 뒤 마음을 잡은 최흥종은 광주 양림동에서 선교 의사의 조수로 일했다. 어느 날 목포에서 활동중인 선교 의사 포사이트가 한 환자를 나귀에 태우고 왔다. 포사이트는 선교사들조차 ‘인간으로 오신 예수’라고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데려온 환자는 온몸이 썩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송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당시만 해도 한센병 환자를 닿기만 해도 나병에 걸린다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돌을 던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포사이트는 환자의 겨드랑이를 양손으로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환자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쳐 버렸다. 그러자 포사이트는 ‘지팡이를 집어주라’고 했다. 최흥종은 고름과 핏물이 잔뜩 묻은 걸 집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론 괴로웠다. 마침내 용기를 내 지팡이를 집어 들어 환자에게 건네주자 다 문드러진 환자의 얼굴에서 작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순간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밀려왔다. 최흥종이 ‘작은 예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천형의 병이 든 것만도 기막힌 일인데,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이웃들로부터 돌팔매질 받아 가슴마저 찢겨지는 환자들의 기막힌 설움이 바로 그의 설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뒤 자기 땅 1,000평에 한국 최초의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인 한센병병원을 설립해 환자들을 보살폈다. 광주에서 한센병 환자들이 많아지자 광주시민들은 ‘광주를 문둥이 촌으로 만들려 하느냐.’며 반발했다. 그러자 애양원의 전신인 한센병환자촌으로 옮겨 함께 살았다.

최흥종은 한국한센병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해 환자들을 돌보았으나 여전히 갈 곳 없는 환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한센병 환자 행진이었다. 여수 등 각처에서 합류한 환자 수백 명이 광주에서 서울까지 무려 열하루에 걸쳐 행진하였다. 동시에 조선총독부 총독에게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촌을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소록도 한센병환자갱생원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흥종의 삶에 감명 받아 평생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헌신하다 삶을 마친 의학박사 신정식의 책상엔 늘 사진 석 장이 놓여 있었다. 그 주인공은 최흥종과 포사이트 그리고 예수였다. 3·1운동 주동자로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최흥종은 전라도의 시민운동·청년 운동의 대부이기도 했고, 북문안교회·북문밖교회 등 호남 지역 초기 교회들을 이끌어 호남을 기독교의 메카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독립운동 단체들이 갈라져 싸움 벌일 때도 뒷골목 두목 출신의 카리스마와 넓은 포용력을 지닌 그 앞에선 모두 하나가 되었다. 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 1935년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친구에게 부탁해 거세를 한 후 스스로 명예욕과 물욕·성욕·식욕·종교적 독선 등 다섯까지 집착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오방정(五放亭)을 짓고 무등산 속에 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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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목사

해방 뒤 김구가 일주일간 오방정에 머물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자고 간곡히 호소하였으나 끝내 거부당하자 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휘호를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성경』과 『도덕경』을 읽으며 생의 마지막 100일을 단식으로 마무리한 뒤 육신을 벗자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많이 애통해 하였다. 수백 명의 환자와 걸인이 관 뒤를 따르며 ‘아버지 저희들은 이제 어찌 합니까.’라고 뒹굴며 울부짖었다.

문순태는 오방을 ‘우리 시대 마지막 성자’라고 작품에서 극찬하였다. 최흥종 목사가 이해하는 복음과 기독교는 무엇이기에 목회자로서, 사회운동가로서 그리고 사회사업가로서 살았는가? 다양한 해석을 통하여 내려진 결론은 세 가지 영역은 독립적인 영역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된 종합이었다. 그에게는 기독교의 복음과 사회 운동 및 사회봉사와 목회 활동이 다 일직선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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