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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의 덕양거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E010301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현

지금 덕양거리에는 벚나무가 보이지 않으나 예전에는 많았다. 일제시대에 덕양거리에 벚나무가 많이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 초창기 일본인들이 덕양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덕양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벚나무를 직접 심었는지 아니면 마을사람이나 또는 동원된 학생들이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직간접적으로 일본인들이 벚나무를 심었던 것은 확실하다. 일설에 의하면 소라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선 1920년대에 국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여수에 있는 일본인 재향군인들이 학생들을 동원하여 여수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사쿠라’라고 부르는 벚꽃이 일본 국화인 만큼, 덕양거리에 벚나무를 심고 소라초등학교 교정에 히말라시다 등 일본 수종을 심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의 문화를 우리 땅에 의도적으로 이식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여하튼 일본인이 덕양에 들어오게 되면서 조성된 벚나무는 덕양의 마을 입구에서부터 역의암이 있는 도로까지 도로변 양쪽에 대략 200여 그루가 들어서 있었는데, 봄이 되면 도로변 400m가 완전히 벚꽃으로 뒤덮여 그야말로 절경이었다.(문재홍 옹, 85세, 당시 덕양 거주)

그 당시에는 매년 4월에 벚꽃이 피면 가까운 여수나 순천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광주나 서울 등지에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삼삼오오 벚나무 아래에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벚꽃놀이를 즐겼다. 밤이 되면 그 벚꽃 속에 오색찬란한 전구들이 가지각색으로 수를 놓았다. 벚꽃이 전구 불빛과 어울려지면서 이루어진 야경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하고 신기하였는데 이때가 세동마을 벚꽃놀이의 절정이었다.

해방이 되자 벚꽃이 일본인의 꽃 즉 일본 국화(國花)라고 여겨 방치된 데다가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먹고살기도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관리가 되지 않아 한 그루 두 그루씩 고사되기에 이르고 봄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제 때 절정에 이르렀던 세동마을 벚꽃놀이는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단지 세동의 벚꽃놀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현재 80대 노인 몇 명뿐이다.(문재홍 옹, 85세, 당시 덕양 거주)

일제강점기에 덕양이 벚꽃놀이 마을로도 유명하였지만 당시 덕양은 여수읍 다음으로 도시화된 곳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의 성장 속도와 비교하여 볼 때 소라면 소재지인 덕양거리가 일제 때에 비하여 그리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일제 때에 덕양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덕양거리는 그야말로 도시화되어 있었고 번화가였다. 덕양거리에는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고 여수군 안에서 여수읍을 제외하고는 제일 북적거리던 곳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쇼오도메 술도가와 사사키라는 상점은 다른 면 단위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컸고, 한국인 신경우가 경영했던 화신상점이라는 비단집은 여수읍내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

이때는 한일합병이 된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사회 각계가 점점 일본 문물에 물들어가고 있던 시절이어서, 빨래도 양잿물 대신에 비누를 사다가 썼고 낫이나 호미·곡괭이 같은 농기구도 대장간보다는 여수장에 가서 사다 쓰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덕양 사람들은 이런 생활용품을 사려면 여수장까지 가야 했기에 덕양에 잡화점 등이 꼭 필요할 만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사람 형편에서는 큰 잡화상을 차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 사사키 시카노스구이는 이런 면에 착안하여 1930년 5월 1일 소라면사무소 건너편에 사사키상점을 차렸다. 상점에는 의류만 빼고 웬만한 생활용품은 없는 것이 없었고 솥이나 쟁기 같은 농기구, 비료, 양약을 비롯해서 철물까지 다양하게 취급하였다. 그 중 인기 품목은 석유·비누·성냥·설탕·과자 등이었는데, 항상 물건이 동나기 일쑤여서 아침부터 줄을 서야 물건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 36년 동안 일본 상인들이 여수군의 면 단위에 진출한 곳은 오직 소라면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덕양은 1930년부터 전깃불이 들어왔고 기차역이 있는데다, 여러 상가와 주조장 등이 형성되어 있어서 여수읍에 버금가는 도시였음은 틀림없다. 더구나 1935년 3월경에 도시 지역에서도 흔치 않는 병원인 에또의원까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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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오도메 술도가 자리

여관만 보더라도 대동여관·호남여관·덕양여관 등 큰 여관이 세 개씩이나 있었고 도로 양편에도 크고 작은 상점들이 즐비하여 분위기가 상당히 활기 넘쳤다. 더욱이 매년 벚꽃이 피는 4월이 돌아오면 길 양쪽에 온 하늘과 도로를 뒤덮은 벚꽃과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꿀벌들의 광경이 어울린 벚꽃의 명소 덕양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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