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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위해서 살았어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E020102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현

농촌 마을에서 요즈음처럼 하루 세 끼 걱정 없이 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존해 있는 노인들 말에 의하면 정말로 먹기 위해서 살았다고들 한다. 노인들이 기억하는 어려운 시기는, 물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본래 한국 농촌 경제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소수의 지주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일본의 대농장들이 한국에 진출하게 되자 한국의 농촌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자작농가가 반자작농 또는 소작농으로, 반자작농가는 소작농으로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작농이라고 해도 몇 마지기를 경작할 정도여서 자급자족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지경이었다.

지주로부터 소작을 받은 농가들은 더욱 힘들었다. 소작료가 뭇갈림이든 정도(定賭)이든 간에 항상 지주가 유리하였다. 태풍이나 흉년으로 작황이 좋지 않을 때에는 하루 두 끼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관에서 강제 동원하여 품삯도 없이 도로 개설 등 부역을 시키기도 했다. 일제 때의 부역은 봄철에 20일, 가을철에 20일 해야 하는데 이때에는 농번기였기 때문에 일반 농가에서는 일손이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오른 1943년 2월부터는 농가당 생산 책임제란 목표량을 시달해 놓고 생산을 독려하였으며 가을 수확철이 되면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식량을 차출해 갔다. 덕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수군청 산업과에 나온 일본인 직원들이 소라면 일대를 돌아다니며 위협을 하면서 공출을 강요하였다. 이때가 가장 배고프고 참기 어려운 시기였다고 한다. 어떤 농가에서는 징용에 끌려간 가족이 있으면 일할 사람이 부족하게 되어 경제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문재홍 옹, 85세, 당시 덕양 거주)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농촌의 어려운 경제 사정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는 미군정 체제였는데 국방경비대 급식용이니 양곡 정책 조절용이란 명목으로 공출이 있었으니, 각 농가에서는 핍박의 연속이었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공출이 없어졌으나 농가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1960대~1970년대가 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대다수 한국의 농촌은 정말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정종순 할머니의 1940년대 후반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아버님이 지금의 미평에서 기름 장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덕양으로 이사 왔는데 농사지을 농토가 없어서 매우 어려웠다.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들이 쌀을 찧을 때 떨어지는 싸래기 가루를 얻어다 반죽해 쪄서 먹었다. 그것은 찰기가 없어서 그런지 맛도 없고 솥에 쪄도 부서져 버렸다. 이것도 없을 때에는 부모들이 산에서 나물 등을 캐서 삶아 먹었다.

결혼 후 남편의 대장간 운영으로 그런대로 생계가 유지되기는 했으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 대장간 일을 돕다가 해가 질 무렵에는 언제나 덕양천에 나가서 민물고동을 채취해서 덕양에 거주하면서 자주 전주로 물건을 팔려 나가는 마을사람에게 넘겼다. 그분은 다음날 며느리한테 판 대금을 맡겼는데 지금의 시세로 본다면 돈 만 원 정도 되었다.(정종순 67세, 당시 덕양에 거주)

1960년대 초에는 부역을 나가면 밀가루나 옥수수 가루를 배급받을 수 있었다. 배급을 받으려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림녹화 사업을 위해 산에 오르기도 하였다.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는데 이것이 간식이 아니라 끼니였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아이들도 매우 힘들었다.

어린 동생들은 부모들이 논밭에 일하러 나가면 점심밥을 얻어먹으려고 따라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집에 얼마 남지 않은 밥은 형이나 누나들 차지였기 때문이다. 보통 막내들이 부모를 따라 나섰는데 얼마 되지 않은 밥에 자식이 먹겠다고 졸라대면 부모들은 밥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다른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배가 고픈 시절에는 명절이 되면 다른 마을 사람들이 덕양에 와서 밥이나 떡을 얻어먹으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녔다고 한다. 덕양 사람들은 반대로 다른 마을에 가서 얻어먹기도 하였다. 특히 애를 업고 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면 대부분의 집주인이 잘 주었기 때문에 일부러 애를 등에 업고 다녔다. 서로 모르는 얼굴이지만 집주인들은 먹을 것을 조금씩 주었는데 당시에는 관행이었다고 한다.(덕양2구 경로당 할머니들)

명절이 지나면 농촌에서는 일손이 바빠진다. 웬만한 농가에서는 먹을 것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날품을 팔거나 행상을 해야 했다. 농토가 있는 농가에서는 일손을 구해야 했고 농토가 없으면 품을 팔아야 했다. 품삯은 1970년대 무렵에는 하루 종일 일하게 되면 남자들은 쌀 고봉 1되, 여자는 쌀 1되 정도를 받았다. 오늘날 하루 품삯 4~5만 원과 비교하여 본다면 엄청난 차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시의 돈벌이는 요즈음처럼 학비나 용돈 마련이 아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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