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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시기 덕양의 장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E030101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현

예로부터 농어촌 지역에서는 식량이나 생활용품을 거의 자급자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체적으로 생산이 어렵거나 필요한 물품은 봇짐장사로부터 구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생산자에게 주문하여 사용했다. 수요와 공급이 그다지 많지 않은 농촌 지역에서 장터가 형성될 수가 없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골 마을인 이곳에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개화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여수시 소라면 관기리에 있던 소라면사무소가 덕양리 세동으로 옮겨오게 되고 1930년 9월 면 소재지인 덕양리 1270-1번지를 비롯한 5필지 일대에 세동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여수에서 순천까지 신작로가 개통되어 자동차가 수시로 왕래할 수 있게 된데다 1930년 3월 27일에는 이미 덕양우편소가 문을 여는 등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졌다. 또 5월 27일에는 세동금융조합이 생겼으며 12월에는 철도역을 짓는 등 비약적인 발전이 다가와 있었다.

당시 덕양의 세동장에는 지방 출신 상인들은 별로 없었고 주로 여수와 순천 출신 상인들이 있었다. 좌판을 벌여 놓고 겨우 옷가지와 신발 등 일용품을 팔았지만 상인들이 모이지 않아 장터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자 고민에 빠진 소라면에서는 가축 시장을 유치키로 결심하고 군 당국과 절충을 벌인 끝에 1931년에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여수장만을 상대했던 소 장사들이 세동장을 찾아오게 되었고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을 사고팔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막들이 하나 둘씩 형성되더니 5~6년만인 1935년경이 되어서는 시장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덕양 세동장에서 가장 잘 팔렸던 것은 석유·성냥·비누·고무신·양말·운동화와 학용품·학생복 등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생활용품 등을 사기 위해 농가에서는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기도 하고 또 닭이나 계란·돼지·쌀·보리·콩·녹두·무·배추 같은 돈 될 만한 것은 모두 시장에 내다 팔아야만 했다.

그러나 덕양 세동장에서는 이러한 용품이나 농산물 등이 거래되지 않았다. 공산품에 대한 구매력은 있었으나 농산물에 대한 구매자가 없었다. 각 농가에서는 덕양의 세동장에 물건을 내다 파는 것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여수장으로 가야 했다. 소라면에서 여수까지는 30리 이상이나 되어 여수장이 서는 날에는 새벽밥을 먹고 등불을 밝히면서 남자는 지게를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나와야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덕양의 세동장은 개장 이래 몇 년간 활성화되었으나 제대로 구실을 못하고 해방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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