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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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989年九二馬昌勞聯-事件 |
영어의미역 | Case of Terrorism in Masan and Changwon Labor Union on September 2th, 1989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하경 |
성격 | 테러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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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9년 9월 |
종결연도/일시 | 1989년 9월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마산|경상남도 창원 |
관련인물/단체 |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허재우|서종|윤미정 |
[정의]
1989년 9월 2일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사무실을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습격한 사건.
[개설]
1988년 노태우 정권의 출범 이후로 학생과 재야인사에 이어 노동자까지 테러를 당하는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988년 8월 서울의 ‘우리마당’ 피습 테러, 1989년에는 현대중공업 연쇄테러, 3월의 김종대 중위 테러, 5월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피습 테러, 6월의 가톨릭농민회 중앙본부(대전) 피습 테러, 오홍근 기자 테러 등이 그것이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미해결로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1989년 하반기에는 정기국회와 맞물려 각종 법 개정 투쟁이 정권을 압박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노동악법 개정투쟁, 교사들의 교육악법 개정투쟁, 농민들의 수입개방저지 및 추곡가 인상투쟁, 노점상과 빈민들의 생존권 확보 투쟁, 국가보안법 등 반민주악법 개정투쟁 등 어느 것 하나 정권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결국 9·2 마창노련 테러사건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정치적 진출과 민주화 요구를 차단할 목적의 하나로 행한 정치폭력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지역적으로는 (주)통일노조를 압박하고, 전국적으로는 코앞에 닥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을 저지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발단]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사무실은 지하에 있었다. 한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고, 무더운 날씨 때문에 문은 항상 열어놓아야만 했다. 1989년 9월 2일 습격 당시 사무실 안에는 허재우, 서종, 윤미정 세 사람이 각자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등이 꺼졌고 어디서 잠입했는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세 사람의 머리와 얼굴을 난타하기 시작하였다.
연락을 받고 마창노련 조합원이 사무실로 가보니 세 사람은 나일론 끈으로 손발이 묶이고, 청테이프로 입이 봉해진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즉시 부상자들은 경남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서종은 머리를 수십 바늘 꿰맸고, 허재우는 왼쪽 광대뼈를 보강하고 바로잡는 수술을 하였다.
이 사건은 1989년 9월 1일 밤 울산민족학교,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울산·울주지회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하여 사람들을 집중구타한 후 달아난 사건과 장비와 수법, 그리고 주도면밀함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특히 잘 훈련된 자들에 의해 일사 분란한 명령 체계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정치권력이 직접 또는 배후에서 테러를 사주한 것으로 의혹을 받았다.
[경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현 정권의 폭력성을 알리는 대대적인 거리홍보를 연일 펼쳤고, 동부경찰서 항의 방문도 연일 계속되었다. 평민당 진상조사단은 울산과 9·2 마창노련 테러사건이 놀라울 만큼 공통점이 많아 정기국회에서 정치 쟁점화 하여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9월 6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주최로 수출자유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에서 열린 폭력테러 진상보고 및 공정수사 촉구를 위한 마산창원노동자결의대회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조합원 1만 5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날 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가 마련한 마창노련 폭력테러 규탄 및 진상규명을 위한 범시민 결의대회는 종교지도자·농민·교사·교수·학생 등 각계각층이 참가했을 정도로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대회였다.
[결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과 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는 9·2 마창노련 테러사건이 정치권력과 극우폭력단체가 직접 개입한 정치적 테러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수차례에 걸친 기자회견과 시민홍보, 거리시위, 경찰서 항의방문 등을 통해 경찰의 공정하고 발빠른 공개수사와 공식적 수사발표를 끈질기게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수사의 초점을 계속 내부자작극에 맞추었고 9월 23일 경상남도 경찰청에 대한 국정감사를 앞두고 결국 내부소행으로 매듭지으려 함으로써 더 큰 분노와 투쟁의 불씨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