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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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月抗爭 |
영어의미역 | June Opposition in 1987 |
이칭/별칭 | 6월 민주항쟁,6월 민주화운동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하경 |
[정의]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일련의 민주화운동 중 경상남도 마산·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
[개설]
6월항쟁은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로부터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의 6·29특별선언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총 인원 400~500만 명이 참여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민주헌법쟁취 등을 요구했던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운동으로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등으로도 불린다.
[역사적 배경]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의 대통령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여기에 맞서 교수·출판인·변호사·전직 및 현직 국회의원·문화운동단체 등이 4·13조치에 반대하는 시국성명을 연일 발표하였으며 종교인들의 단식기도와 재야인사·노동자·농민·학생들의 반대시위와 단식농성이 줄을 이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광주항쟁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억눌렸던 반인권적인 정권에 대한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였으며, 5월 27일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투쟁전선에는 야당까지 합세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6월 10일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에 같은 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의 개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6·10국민대회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여 가두시위, 연좌농성시위, 정치집회, 야간시위, 철야농성 등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하루에만 10만 경찰병력에 88기동대(세칭 백골단), 페퍼포그, 최루탄 등을 동원하여 펼친 폭력적 진압 작전에도 불구 숨바꼭질 투석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의 관공서와 언론사, 국회의원 사무실 등에 대한 습격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경찰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도 1~2만 명 단위로 뭉쳐 이동하면서 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마산·창원 지역의 범국민대회도 이날 오후 6시를 기해 마산의 3·15의거탑 앞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경남본부 주최로 시작되었으나 즉각 출동한 경찰에 의해 시위가 좌절될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경남대학교 학생들과 시민이 합세한 시위대열이 경찰의 봉쇄를 뚫고 마산운동장 쪽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경찰에 의해 무차별로 발사된 최루탄 가스가 제16회 대통령배축구대회 경기가 진행 중인 운동장 안에까지 퍼져 선수들이 고통을 호소하여 경기가 중단되자 이에 분노한 3만여 관중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16차선 도로를 완전히 점거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그리고 마침 대형 태극기를 펼친 시위대가 그 앞에 서게 되면서 이들도 자연스럽게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이제는 경찰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퇴근 중이던 노동자들까지 대거 합세하면서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 대열이 중심 도로 곳곳을 점령하고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새벽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부 도로에서는 경찰들이 퇴각하였고 심지어 무장해제 당하는 경찰들도 속출하였다. 또한 이날 하루 우병규 민정당의원 사무실, 시청, 방송국과 방송차량, 파출소 등 여러 곳이 불에 탔다.
이후에도 3·15의거탑 분수로타리, 창동코아, 북마산 회산다리 부근, 오동동네거리, 육호광장 등지에서 수백~수천 명씩 무리를 이룬 시위대가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며 산발적인 시위를 연일 계속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통해 시위는 다시 크게 폭발하였다. 백골단의 폭력적인 무차별 과잉 진압에 분노하여 시민들이 직접 돌과 화염병을 들고 대응하는 바람에 거리투쟁은 전쟁을 방불케 하였다. 술집에서 나오던 일반 시민들까지 화염병을 들었으며, 택시 운전기사들도 거리를 점거하는 등 시위는 6월 27일과 28일까지 밤새도록 이어졌다.
[결과]
6월 10~11일의 시위 과정에서는 모두 79명이 연행되어 그 중 3명이 구속되고 16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6월 27~28일의 시위 과정에서는 모두 3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경찰에 의해 가혹한 집단구타를 당했다. 이들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허리가 꺾이고, 머리가 터지고, 코뼈가 내려앉았으며, 머리카락이 수없이 빠지고, 온몸에 찰과상과 타박상으로 멍이 든 상태에서 밤을 꼬박 새며 조사를 받았다. 6월 29일 갈비뼈가 부러진 부상자 2명이 병원에 입원하였고, 나머지 연행자들은 가족 및 시민들과 합세하여 마산경찰서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사과문 작성 및 신문방송 보도, 피해보상 등을 포함하는 7개 항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 결과 경찰서장으로부터 공개사과를 받아냄과 동시에 연행자 전원을 석방시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