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16 |
---|---|
한자 | -現代化-傳統-鎭海石洞- |
이칭/별칭 | 돌리마을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남식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행정동 및 법정동.
[개설]
석동은 북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장복산 줄기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 경화동·병암동, 동쪽으로 자은동, 남쪽으로 이동에 면해 있는 진해구의 중부권에 위치해 있다. 관할 법정동은 석동과 이동의 일부이다. 2012년 11월 30일 현재 가구 수는 6,768세대이며 인구는 1만 9745명이다. 1985년 상주 인구 조사 때 308세대 1,635명과 비교하면 27년 만에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석동은 역사적 변천을 겪으며 창원군 진해읍 관할이었다가 진해읍이 1955년 9월 1일 시로 승격하면서 법정동을 그대로 행정동으로 하였으며, 1986년 행정동을 개편하면서 그대로 존치시켰다.
전통적인 농촌 마을인 석동에 서서히 변화가 불기 시작한 것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행정 기관이 속속 들어오면서부터이다. 1999년 7월 주공은 진해시 석동 2지구에 연말까지 주택 단지 조성 공사를 추진하여 4만 9500㎡에 2,800가구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그해 5월 1일 창원시 성산동과 진해시 석동을 연결하는 25번 국도가 개통되어 진해와 산업 도시 창원이 바로 소통되는 발판을 마련한 뒤였다. 그리고 뒤이어 2004년 1월에 개통된 진해의 대동맥인 산업 도로가 석동을 관통하면서 LG 진해 자이[현 진해 GS 자이] 516가구, 진해 푸르지오 647가구, 진해 우림 필유 1,292가구 등 대규모 아파트가 분양되었다. 이후 계속적인 발전으로 진해시 도시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하며 진해의 중심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전통 마을에 급격히 일어난 도시화로 토착 주민의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가운데 기존 토착민과 더욱 늘어나는 아파트 입주민들 사이가 소원해졌다. 그러다 2007년도에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장복산 등산로를 함께 정비하면서 소통의 물꼬를 트고 동민 화합의 기틀을 다졌다. 석동의 등산로는 조선 시대 현감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들렀던 곳으로 현감이 물을 마셨던 약수터 통새미가 있다. 이시휘·이지거 웅천 현감의 청덕표가 있어 마을의 자긍심을 높이고 역사의 뒤안길을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때 주민의 수가 적어 분동으로 인한 해체의 위기가 있었으나 석동 마을회의 강력한 의지로 석동이 유지되었다.
2013년 2월 현재 자생 단체는 주민 자치 위원회 외 10개가 있고, 기관으로는 진해 경찰서, 경상남도 창원 교육 지원청, 창원 세무서 진해 민원실, 창원 지방 법원 창원 남부시 법원, 진해 등기소, 석동 정수과, 국민 체육 센터, 기적의 도서관 등이 있다. 학교는 진해 세화 여자 고등학교, 석동 중학교, 석동 초등학교, 동부 초등학교, 장복 초등학교가 있고, 금융 기관으로는 경남 은행, 국민 은행, 농협, 신한 은행, 새 진해 새마을 금고가 있다.
[유구한 동명의 유래]
석동이란 동명은 원래 돌리였다. 조선 시대 전국의 호수(戶數)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 총수』에 돌리(乭里)로 표기되어 있고, 그 이후 ‘석리동(石里洞)’으로 표기되어 왔다. 그러나 현지 토착 주민들은 아직도 돌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이 마을이 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997년에 펴낸 『진해시 중요 유적 정밀 지표 조사 보고』에 따르면 이곳에 삼한·삼국 시대 때 대규모 매장 유적이 발굴되어 진해 중심권의 고대 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석동 고분군은 안민 고개 동쪽 편, 석동의 후사면 능선 산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밭·농장·목장 등으로 개간할 때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이 위치한 주변이 일찍부터 ‘고려장 터’, ‘단지골’이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온 곳으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지명 유래는 이곳에서 토기류가 많이 채집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석동에 선조들은 어떻게 들어왔나]
석동은 전쟁과 관계가 깊은 마을이다. 임진왜란 이후 분성 배씨와 선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시작되었다. 석동의 입향조는 실존 인물로 배윤[1570~1615]이다. 배윤의 자는 명언, 분성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으로 고려조 병부상서를 지낸 분성군 배원룡이 유명하고, 증조할아버지 배필원은 퇴계와 같은 해에 출생하여 사교하였다. 할아버지 배연손은 선전관을 지냈고, 아버지 배수운은 진사로서 합천에서 김해로 이주하여 왔다. 부인은 월성 최씨이고 아들은 배만생, 손자로는 배유림·배유민·배유달·배유신이 있다. 임진년에 왜군이 부산포를 침입, 김해까지 들어왔는데 김해 칠산 지방에서 처음으로 의병 봉기가 있었다. 배윤은 아버지 배수운과 함께 의병의 한 사람으로 출전하였다. 아버지는 적탄에 맞고 죽기 직전에 “가문과 국가의 원수를 설욕치 못하였구나.” 라며 유언을 남겼다. 배윤은 그 길로 남은 무리와 군량미를 거두어 장사 32명을 데리고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때 배윤의 나이 23세였다. 배윤은 출전할 때마다 연전연승하여 포상을 받고 충순위에 봉해졌다. 갑오년[1594] 제2차 당항포 해전에 출전하여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이순신이 요양케 하여 자은동 민가에서 몸을 돌보았으나 차도가 없어 석동으로 이주하였다. 회복하지 못하고 1615년에 45세를 일기로 죽었다. 당항포 출전 이듬해에 통정대부 용마양위 부호군에 봉해졌으며 원종 공신에 올려졌다. 배윤의 묘는 자은 초등학교에서 웅암으로 오르는 등산길 1.2㎞ 고지에 있다.
선산 김씨가 석동에 세거한 시기는 1744년 김창보가 웅천현 중면 돌리로 이거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1681년 거창에 거주하던 9대조 김필강이 당시 거창군 동면 가남[현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에서 웅천현 비포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비봉동]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1720년 김대성이 웅천현 하서면 양곡으로 이거하였다. 선조가 진해로 들어온 배경은 확실치 않으나, 현재 석동 마을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김한식의 호구단자에 의하면, 김창보의 처가 석동에 있던 분성 배씨인 것으로 보아 혼인과 함께 처가 쪽으로 온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선산 김씨의 내력은 10대조 김현길이 외아들 김필강-김창보-김진벽으로 4대가 독자로 이어지다 김진벽의 다섯 아들 김정일·김우일·김혁일·김호일·김호민으로 이어져 번창하였다. 고조할아버지 김희락[1796~1888]은 절충장군으로 용양위 부호군의 직함을 지녔으며, 증조할아버지 김수묵은 제2대 주자 정동 강당(朱子井洞講堂)을 맡았다.
해방 직후 선산 김씨는 100여 호 가량 되는 마을에 15호 정도 살았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석동은 분성 배씨와 선산 김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여 왔으나 산업화 시대에 따라 각지로 흩어졌고 지금은 혼성 마을로 변하였다.
[경상남도 최초로 항일 농민 저항이 일어나다]
석동은 돌의 단단함과 같이 외세에 대해 굳건한 저항을 한 곳이기도 하다. 석동에서 있었던 항일 농민 운동으로 ‘돌리 왜 난리’가 있다. 이곳은 경남 최초의 항일 농민 운동으로 봉기가 일어난 곳이다.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 농민들이 직접 일본에 저항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 사건에 직접 가담한 우위수[1847~1923]의 증언이 있다.
석동 뒷산에는 마을의 공유림으로 버덩이 있는데 소를 놓아먹이기에 알맞은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산림을 불법 점거하여 소나무를 무단으로 베어버리고 과수원을 만들어버린 일본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쇼오고[詳吾]인데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 강탈을 추진하고 있을 때 마산 이사청 이사관으로 있다가 후에 마산 부윤이 된 미마쓰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지위를 이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오만불손하게 대하고 한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행패를 참지 못하고 추방하려는 밀의를 하였다. 이장 배효준[1871~1923], 동민 김시영[1880~1924], 우위수 등이 모여 쇼오고를 쫓아낼 방도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심어놓은 나무를 뽑아버리고 버드나무를 심자는 의견을 내었다.
1912년 5월 19일 이장의 연락에 의해 출역한 80여 명의 마을 장정들이 일본인이 심은 과일나무를 뽑고 100그루씩 추렴한 버드나무를 심었다.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리 없던 쇼오고는 작업을 방해하며 모멸적인 언사를 일삼았다. 동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불법 점유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항의를 하니 기세에 눌린 그는 진해 경찰서 경화 주재소에 고발하였다. 고발을 받은 주재소 일본인 순사들은 동민의 작업을 제지하였으나 동민들은 의연하게 계속 나무를 심었다. 순사들은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했지만 돌리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에 부딪혀 오히려 도주를 하다가 논에 빠지고 말았다.
사태의 중대함을 안 진해 경찰서는 무장 일본 경관을 앞세우고 일본인 의용 소방대원, 일본인 거류민 등 300여 명을 동원하여 석동으로 몰려들었다. 농민들은 현장에서 무장한 경찰관들이 어떤 만행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판단 하에 뿔뿔이 흩어졌다. 총격을 하면서 쫓는 일본인들을 피해 마을 장정들은 도망하였다.
밤이 되자 일본 경찰들은 장정들을 색출하려고 가택 수색을 하였지만 허탕 치고 돌아갔다. 이 날의 궐기로 남은 사람들은 노유자와 부녀자뿐이었다. 그러나 도피를 하고 있던 주동자 배효준 등은 일경의 보복이 예상되고 마을의 평온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하여 도피 사흘째 진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였다. 그들은 경찰서에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부당함을 피력하며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은 큰 죄로 다스리지 못하고 주동자 배효준·배정헌·배정구·배정규 등을 단순한 ‘경찰 공무 집행 방해’로 다스렸다.
이러한 석동 농민들의 저항 운동은 최후까지 가지 못하였지만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의 자긍을 심어주고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커다란 반향 없이 마치 난리가 난 것처럼 큰 소요가 되었다고 해서 ‘돌리 헛 난리’라고 명명한 향토 사학자가 있지만 현존하는 석동마을 어른들은 ‘돌리 왜 난리’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적지에서 산화한 청춘 배상권]
일제 강점기에 석동에서 태어나 대외적으로 활동한 배상권[1915~1942]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27세에 옥사하였다. 석동의 야학교에서 수학하다 향학열에 불타 16세 때 형이 살고 있는 고베시에 가서 호쿠신 상업 학교 야간부를 졸업하였다. 고학으로 출세할 생각이었으나 그 기간에 동포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민족 차별을 느끼고는 조선 기독교 고베 교회에 나가 기독교를 믿었다. 그러고는 해외에서 망명 지사들이 독립운동하는 것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집회 활동을 하다 치안 유지법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일본의 천황제를 타도하여 일본의 국체를 변혁시켰다는 선동죄가 적용되었다. 무수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병을 얻어 구속된 지 3년 만에 가족에게 빈사 상태로 넘겨졌다. 죽기 직전 정치범을 옥사시켰다는 책임을 면하기 위한 일본의 소행이었다. 화장장으로 가는 장의 행렬에도 형사가 따라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그의 행적은 재일 사학자 김정명의 저서 『조선 독립운동』에 실렸고 양심적 일본 학자는 『소화 특고 탄압사』에서 그의 생애를 밝혀냈다. 한국 정부에서는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그의 항일 공적을 기렸다.
[석동의 중추에 석동 마을회가 있다]
1. 석동 마을회의 내력
석동의 한 축에 석동 마을회를 만들고 이 마을회를 23년간 이끈 배종욱 회장이 있다. 2013년 1월 총회에서 회장 자리를 내줄 때까지 그는 석동 마을의 파수꾼이었다. 그와 함께 길을 걸어온 김한식 총무에게 회장직을 물려주었으며, 아직도 석동 마을의 원로로 있다.
석동도 여느 마을과 같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배종욱은 1964년에 농사를 지으며 진해 시장 김희구로부터 여러 표창장을 받았다. 당시 농촌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표창장의 내용은 이렇다. “귀하는 정부 중농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중략] 새로운 경종 방법을 연구 실천하고 [중략] 농가 소득을 증대시켜 농촌 경제 향상에 이바지한 공로가 지대하므로 뜻 깊은 농업 증산 대회를 맞이하여 이에 표창함.” 또한 같은 해 진해시 4H 구락부 경진 대회에서 석동 구락부 농촌 자원 지도자로서 ‘농민 학습 조직체 육성에 기여’하여 표창을 받았다.
1969년 5월 23일 문화 공보부는 상록수를 선정했다. 이것은 나무를 선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 상록수를 선정한 것이다. 전국에서 뽑은 18명 중 1명이 진해시 석동에 사는 배동백이었다. 당시 나이 33세. 농어촌에 살면서 향토 문화 발전에 공이 큰 이들은 상금 5만 원을 받고 중앙청에서 6월 3일 상을 받았다. 이렇듯 작은 마을에 불과한 석동이 지금의 큰 마을로 성장한 것은 그만큼 향토 의식이 강했던 탓이 아닐까 싶다.
석동 마을회는 마을 소유의 땅이 많다. 196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당시 정부 포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땅을 샀다. 이후 이 종잣돈이 계속 불어나 진해구의 가장 금싸라기 땅인 석동 주민 센터를 기부 채납하기도 하였다. 평당 가격이 웬만한 서울 땅과 맞먹는다.
2. 야학에서 동사무소, 그리고 동민의 집으로
배종욱 석동 마을회 전 회장 집은 아직도 마당 한가운데 빨간 고추를 말리고 있다. 그것은 담 너머 보이는 롯데 마트와 대비되어 농촌의 잔영을 드리우고 있어서 멀지 않아 사라질 석동의 근대를 아스라이 보여주고 있다. 방문 당시 부재중인 그는 노인당에 있었다.
노인당의 정식 명칭은 석동 동민의 집이다. 이곳은 석동의 근대기에 석리 서당이었다. 배정태[1880~1955]가 석동 373번지의 자택 사랑채에서 한문을 가르쳐 배우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석리 서당은 이후 석리 야학교로 발전하였다. 석리 야학은 1919년 배효민에 의해 설립되어 1928년 교원 4명이 100명 이상의 학생을 가르쳤다. 석동은 일찍이 야학교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인근의 다른 마을보다 개화가 훨씬 빨랐다. 이때 이미 주산을 배웠다고 한다. 이 야학교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배상권이 공부하였던 것이다.
일층에는 할아버지 방과 할머니 방이 따로 있고, 이층에는 돌리 풍물패 사무실과 체력 단련실이 있다. 할아버지 방에는 가구 수가 100여 호 가량 되던 석동의 1950년대 전경 사진이 걸려 있다. 석동 동민의 집 앞에는 풍상을 겪으며 커다란 느티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다. 1900년생이니 백 년도 훨씬 넘었다. 이 느티나무는 야학교 때부터 동사무소, 지금의 석동 동민의 집까지 한 세기 이상 변천한 노인당과 석동 마을의 이모저모를 묵묵히 지켜본 셈이다.
3. 등산길이 마을을 만들다
2007년도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경남도 콘테스트에서 석동 마을은 ‘전통과 도시가 함께하는 웰빙 테마 등산길 조성’ 사업으로 대상을 받았다. 진해시가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재정 인센티브를 제공한 결과였다.
지역 주민들은 토착 주민과 아파트 새 주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길을 모색하다 평소 주민들이 자주 다니는 등산로를 정비하기로 하였다. 마을 회장으로부터 석동 등산로의 유래를 들은 뒤라 주민들 스스로 정비하면 더욱 뜻 깊을 것이기에 석동 주민 자치 위원회에서 회의를 열었다.
석동 등산길은 조선 시대 웅천 현감이 석동 산등성이를 지나 창원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이어서 현감 이시휘·이지거의 청덕표가 있다. 청덕표에는 다음과 같은 뜻의 글귀가 있다. “바위 조각에 새긴 글이 비록 다할지라도 그 덕을 기려 길이 칭송하기를 바라노라.” 두 현감의 덕을 오래 기려 석동이 좋은 마을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등산길 초입에 현판을 세웠다. 오랜 세월 방치되다시피 한 청덕표를 찾고 현감이 산을 넘어가는 도중 목이 마를 때 마시던 약수터 통새미를 정비하여 전통을 함께하는 주민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구체적인 사업으로 테마형 돌탑 조성, 돌탑 전망대 설치, 야생화 학습 체험장 조성, 등산로 꽃길 조성 등을 했다. 그리고 장승을 설치하여 장승제도 지냈다. 1.5㎞ 등산로를 조성하면서 주민들이 정성을 들인 꽃길은 진해시 농업 기술 센터에서 지원받아 만들었다.
이런 석동 사랑의 대표적인 한 사람으로 박용대 전 석동 동장이 있다. 그는 동장을 4년 했다. 매일같이 등산로를 출근하다시피 한 그의 노력으로 등산로는 수많은 나무가 자라면서 달라졌다. 또한 통새미에 ‘석동 돌리 통새미 쉼터의 유래’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그 글은 수필가 나순용이 썼는데, 후에 그도 석동장이 되었다. 배종욱 전 회장의 말에 의하면, 이 통새미는 사람뿐 아니라 방목했던 소도 찾아와서 같이 먹었다고 한다. 아마도 사람과 동물이 생명의 근원인 물을 통해 함께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이 통새미가 아닌가 싶다. 석동 등산로는 석동의 앞이 대도시로 발전해나가면 나갈수록 석동 주민의 마음속에 미래로 난 자연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한때 사라질 뻔한 석동]
석동은 1990년대 중반 한때 분동으로 나뉘어 해체될 뻔했다. 시 개편을 하면서 5,000명 이하인 동을 없애려는 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동민 수가 2,500명도 채 되지 않았던 석동이 그 대상이었다. 양 옆으로 병암동·자은동, 아래로 이동에 편입시키려는 계획에 맞서 석동 마을회는 이 마을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에 의해 유구한 석동을 없애려는 정책에 반대해 김병로 진해시장에게 탄원서를 냈다. 심지어 선거 때 투표를 거부하겠다고 궐기하였다. 시의회에서는 당시 석동 출신 배종량 의원이 많은 역할을 하여 강경하게 석동의 존재를 알렸다. 결국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똘똘 뭉쳐 석동을 살려냈다. 이것은 석동 마을회가 아니었으면 이루지 못할 가장 커다란 일이었다. 석동은 진해구 15개 동 가운데 용원동 다음으로 가장 큰 동이다.
진해에서 사라질 뻔한 석동에서 정작 사라진 것은 식용유로 유명한 동방유량 터이다. 당시에는 이동에 함께 속해 있었지만 길을 다니다보면 콩가루 냄새가 코끝에서 연기처럼 진동하던 때가 있었다. 거대한 산업 시설이 경작지와 함께 사라져버린 그 위에 이제는 대형 쇼핑 타운과 아파트, 그리고 상업 시설들이 밀집하면서 진해의 중심 도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만큼 차가 많아지고 복잡하여 길의 소통이 막히는 것은 석동이 껴안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