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6연대 사건[달성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461
한자 大邱 六聯隊 事件[達城郡]
이칭/별칭 대구 6연대 반란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8년 11월 2일연표보기 - 1차 사건 발생, 6연대 좌익계 곽종진 특무 상사가 헌병대 조장필 소위를 사살
종결 시기/일시 1949년 4월 14일연표보기 - 6연대 해체, 22연대로 개칭
발단 시기/일시 1946년 2월 18일 - 국방 경비대 6연대 창설
전개 시기/일시 1948년 12월 6일 - 2차 사건 발생, 6연대 좌익계인 이동백 상사 및 28명의 하사관과 14명의 병사들이 장교 9명을 사살
전개 시기/일시 1949년 1월 30일 - 3차 사건 발생, 6연대 소속 제4중대 내 좌익 사병 일부가 백달현 소위와 하사관 1명을 사살
발생|시작 장소 국방 경비대 6연대 - 대구광역시
종결 장소 국방 경비대 6연대 - 대구광역시
성격 국방 경비대 군인 반란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동백|국방 경비대 6연대

[정의]

1948년 11월 경상북도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 경비대 6연대의 좌익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역사적 배경]

국방 경비대 6연대는 1946년 2월 18일 대구에 창설되었다. 6연대는 4연대와 함께 군대 내 좌익 세력이 가장 깊게 뿌리내린 곳이었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된 이래 같은 해 10월 여수 14연대가 4·3 사건 진압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48년 10월 24일 정부군이 여수 전역을 탈환한 뒤 군대 내 좌익을 숙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구 6연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구 6연대 사건은 대구 6연대 반란 사건이라고도 한다.

[경과]

1948년 11월 2일 대구 6연대 좌익계 곽종진 특무 상사가 자신을 연행하러 온 헌병대의 조장필 소위를 권총으로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구 6연대 사건의 서막이었다. 2차 사건은 1948년 12월 6일 여순 사건 진압 작전 후 복귀하던 6연대 소속 병력 가운데 좌익 성향인 이동백(李東伯) 상사를 비롯한 28명의 하사관과 14명의 병사들이 숙군을 두려워해 장교 9명을 사살하고 팔공산으로 들어간 것을 말한다. 3차 사건은 1949년 1월 30일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6연대 소속 제4중대 내의 좌익 사병 일부가 곽종진 상사 등의 지령을 받고, 백달현 소위와 하사관 1명을 사살한 뒤, 중대원들을 선동하다가 여의치 않자 탈주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달성과 관련된 것은 2차 사건이었다. 2차 사건은 1948년 12월 6일 경상남도 함양 방면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연대 하교대와 2개 중대 병력 380명이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연대 본부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동백 상사는 복귀 후 좌익계 군인들에 대한 숙군을 예상하고, 부대 내 좌익 세력과 탈영을 모의하고, 집결 장소를 달성군 월배(月背)로 정하였다. 같은 날 오후 4시 무렵 달성군 월배에 도착한 이동백 상사는 차량의 불빛을 이용해 전원 하차하여 실탄을 분배받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차량에 분승하고 있던 장교 9명을 사살하였다.

이동백 상사의 뜻에 하교대 출신 하사관 28명을 포함한 42명이 함께하기로 하였다. 그 나머지 장병들은 대구 대명동에 위치한 연대 본부로 복귀하였다. 이에 6연대 본부에서는 병력을 급파하여 진압을 시도하면서 경계 근무에 나섰다. 1948년 12월 7일 새벽 2시 무렵 이동백 상사를 포함한 좌익계 군인들이 낙동강을 건너는 것을 목격한 6연대 병력은 이탈 병력에 대해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동백 상사의 좌익계 군인들은 낙동강을 건너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2차 사건은 1차와 3차 사건과는 달리 6연대 본부가 좌익 군인들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경우였다.

[결과]

6연대는 사건 이후 대대적인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6연대 장병들은 무조건 구속되어 1차 심사를 받고, 그 결과에 따라 법에 의해 처리되었다. 숙군이 마무리되자 6연대는 1949년 4월 14일 해체되고, 22연대로 개칭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인, 경찰관, 학생 등 수십 명의 인명 피해와 수많은 상해자를 내어, 사회의 불안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 6연대 사건은 4·3 사건과 여순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통해 군대 내 좌익 세력의 영향력 정도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숙군 사업 과정에서 군대 내부 좌익계의 반발을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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