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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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自粹 |
영어음역 | Gim Jasu |
이칭/별칭 | 거광(去礦),순중(純仲),상촌(桑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종대 |
[정의]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검교태자태사 김인관(金仁琯)의 8세손이다. 조부는 삼사부사 김영백(金英伯), 아버지는 통례문부사 김오(金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낭장 권수(權隨)의 딸이다. 아들은 평양소윤 김근(金根)이고, 사위는 중랑장 권후(權厚)이다. 김영유(金永濡)가 손자이며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이 고손이다.
[활동사항]
문정공 신현(申賢)의 문인으로,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1374년(공민왕 23)에 친시 문과에서 또 장원하여 덕령부주부에 임명되었다. 편모를 주야로 섬기고 봉양하다가 돌아가자 3년간 시묘를 살며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고 입에 밥을 넣은 일이 없었다 한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져 각지에서 위문객이 끊이지 않았으며, 문익점·남을진 등 명재상이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그 후 시묘하던 곳을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양왕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1년 후에 고신(告身)을 받고 다시 몇 년 후에 전교부령이 되었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충청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 후 이성계가 사헌부대사헌에 명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후에 다시 태종이 형조판서를 제수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김자수의 후손이 음성에 터를 잡아 살았고 지천서원에 제1위로 배향하면서 음성에 경주김씨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학문과 사상]
김자수가 시묘할 때 남을진이 시를 짓기를, “여묘를 사는 그대를 와서 보니/거적자리 앞에 제례가 분명하구려/죽순이 난 것은 정성된 뜻이 간절함이요/잣나무가 말라 죽는 것은 효심을 기울인 까닭이구려” 하였다. 정몽주·이색·이숭인 등과 서로 사귀어 친근하게 지냈다. 충청도관찰사를 지낼 때 고려가 장차 망할 걸 알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시와 술로 회포를 달랬다.
태종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자 탄식하며, “남의 신하가 되어 국가가 망하면 같이 망하는 것이 도리이니 내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왔는데 이제 만일 몸을 망치면 무슨 면목으로 임금과 아비를 지하에서 뵙겠느냐?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하고는 자기 집 사당에 절한 후 영결을 고하고, 아들에게 흉구(凶具)를 가지고 뒤따르라 명하였다.
당일로 길을 떠나 광주(廣州) 추령(秋嶺)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신하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여기에 매장하고 묘도(墓道)의 문자를 만들지 말라”하고는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이에 자손이 유언을 지켜 추령에 안장하고 감히 표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김자수가 광주 추령에 이르러 자결한 것은 이곳이 포은 정몽주의 의대(衣帶)를 소장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방촌 황희가 자결 소식을 듣고 만사(輓詞)를 지어 조문하기를, “충성하려면 충성하기가 어렵네/효도를 이미 다 하였거늘/다시 살신하는 어려움까지 겸했구려”라 하였다. 정순왕후 지문(誌文)에 “고려 말에 휘를 자수, 호를 상촌이라 하는 분이 있어 효행이 있었고, 우리 태종대왕이 관직을 주어 불렀으나 스스로 고려 신하를 자처하고 자결로써 절개를 세웠다”하여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았음을 전하는데, 실록에는 벼슬한 양 기록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문장이 뛰어나 김자수의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묘소]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태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자수의 시묘살이를 국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리고 표창하였으며, 화공에게 시묘하던 모습을 그려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싣도록 하였는데 그 「효자도」가 남아 있다. 또 효자비(孝子碑)가 경상북도 안동시 안기동에 남아 있고 지방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동 옥계서원·영동 초강서원 보은 병산서원·안동 인계서원·타양서원·화산서원·음성 지천서원·영동 충효사·개성 두문동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음성 지천서원에는 제1위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