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642 |
---|---|
한자 | 金宗立忠臣閣 |
영어의미역 | Gim Jongrib Memorial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민식 |
성격 | 정려문|충신각 |
---|---|
양식 | 맞배지붕 목조기와집 |
건립시기/일시 | 1705년(숙종 31)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 |
소유자 | 의성김씨 문중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김종립의 정려각.
[개설]
김종립(金宗立)은 진천 사람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가 군사를 일으키자 진천현의 초관으로 적과 싸우다 험천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진천현감 이충운(李翀雲)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손에 붓대를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는 재주가 달랐도다. 그대가 나라 일로 죽을 때 나는 구차하게 살았으니, 임을 향하는 뜻이 서로 같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네”라는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
진천의 진사 채진형(蔡震亨)이 김종립의 순절에 대한 전기(傳記)를 매우 상세하게 지었으나, 나라에서 내리는 은전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1704년(숙종 30) 손자 김문상(金文商)이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자, 충청북도에 명을 내려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조사 결과 김종립의 죽음이 명백하게 밝혀짐으로써 정려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음성군 문화유적』 등에는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봉사·군자감주부를 역임하였고, 정려 현판에도 ‘행통훈대부군자감주부’라 하여 직명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1624년 증광시 무과 급제자 50명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고, 진천현 초관(종9품 무관직)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기록과는 상반된다. 한편 『기년편고(紀年便攷)』에는 무과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김종립 충신각은 현판의 기록에 의하면 170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충신각은 1983년 원래의 자리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옆 산중턱으로 옮긴 것이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전후좌우 네 면을 홍살로 막았다. 정려 안쪽에는 ‘충신증통정대부행통훈대부군자감주부숭정기원칠십팔년을유이월삼일명립(忠臣贈通政大夫行通訓大夫軍資監主簿崇禎紀元七十八年乙酉二月三日命立)’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현판 뒷면에는 1712년 권상하(權尙夏)가 쓴 「김종립전(金宗立傳)」과 한성복(韓星復)이 1980년에 쓴 「충렬정려중건기(忠烈旌閭重建記)」가 하나의 판목에 음각되어 있다.
[현황]
충청북도 음성군 향토문화재로 의성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