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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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東亮 |
영어음역 | Min Dongryang |
이칭/별칭 | 군삼,송암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병준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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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
성별 | 남 |
생년 | 1660년 |
몰년 | 1732년 |
본관 | 여흥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군삼(君三), 호(號)는 송암(松巖). 첨정 민휘정(閔鰴鄭)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민동량은 5세 때 글을 깨우쳐 주위에서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으며 5~6세 때 부모가 병이 났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병을 간호하였다. 10세에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하늘에 기도하였고, 15세 때인 1674년(현종 15) 아버지 상을 어른같이 집상하였으며, 어머니가 눈물을 거두라고 권하므로 음식을 먹었다.
1704년(숙종 30) 어머니 병이 위독하자 왼손가락 네 개를 끊어 주혈하여 어머니를 소생시켰다. 이듬해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자 괴산 괴탄 동리에 가서 약을 지어 돌아오는데, 깊은 밤에 경용이란 곳을 지날 때 비가 와서 지척을 분간 할 수 없었다. 이 때 홀연 귀화(鬼火:도깨비불)가 길을 인도하여 집에 다다랐는데, 그가 도착하자마자 귀화는 사라졌다.
삼약을 받지 않았는데도 옷소매에 있어 어머니에게 봉양하였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보급하여 어머니의 생명을 3일 더 연장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3년간을 죽혈로 시묘(侍墓)하고, 대상하던 날 아침에 죽을 먹던 그릇이 홀연 세 번 소리를 내고 갈라져 깨졌다. 사람들이 놀라 “이것은 도깨비불과 인삼과 그릇 깨지는 세 가지 소리로 이상하다”고 말하였다.
1721년(경종 1) 조문명(趙文命) 어사가 민동량의 효행을 알려 음성현감으로부터 복호(復戶)를 받게 되자, 민동량은 “이것은 잘못된 은전이니, 내가 어찌 효자로 자처하여 받으리오” 하고 힐난하며 사양하였다.
[묘소]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06년(순조 6) 통훈대부(通訓大夫)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贈職)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 효자 정문을 세웠다가, 후손들이 금왕읍 신평리 강거리로 옮겨서 ‘민효자정문’이라 부른다.
상당리 당골에 민동량의 비석이 있던 곳을 ‘빗돌거리’라 불러 그 이름만 전해지고 있으며, 정려문에는 ‘효자증통훈대부호조좌랑민동량지문상지육년병인삼월일명정(孝子贈通訓大夫戶曹佐郞閔東亮之門上之六年丙寅三月日名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