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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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법리에서 독점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독점재와 오성」은 독점재가 장군이 태어날 지세인 것을 알고 이곳을 빼앗기 위해 이여송이 선조에게 바둑 내기를 청하였는데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도움으로 내기에서 이겨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를 지켰다는 지략담이다. 2006년 박찬익이 집필하고 박이정에서 펴낸 『새로 발굴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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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용리 반룡사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삼존불 좌상. 고령 반룡사 목조 비로자나 삼존불 좌상은 본존인 비로자나 불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협시 보살상의 3구로 구성되는데, 그 크기로 보건대 원래부터 반룡사의 중심 불전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009년 좌협시 보살상에서는 조성원문 등의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조성원문에는 고령 반룡사 목조비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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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원(高天原)은 일본 역사 서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일본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에서 나왔다. 일본 건국 신들의 고향이 바로 고천원인 것이다. 고천원이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한 가운데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고천원이 후기 가야의 수도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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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행하는 여러 가지의 신앙 행위. 기자치성은 자식이 없는 집안에서 자식, 특히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행하는 여러 형태의 신앙 행위이다. 이를 ‘기자신앙’, ‘삼신타기’라고 일컫기도 한다. 기자치성은 생명을 존중하는 측면과 동시에 남아 선호사상에 대한 강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 아들이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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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의병장 김면(金沔)의 유적. 송암(松庵) 김면은 1541년(중종 36)에 태어난 학자로 참봉(參奉),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경상우도의 3대 의병장 중 한 사람이었으며 곽재우, 정인홍과는 달리 남명 조식의 문인인 동시에 일찍이 퇴계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마하여 퇴계 문인들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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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선생은 62세이던 1492년(성종 23) 8월 19일 밀양에서 별세했다. 사림파에서는 ‘도덕박문왈문 염방공정왈충(道德博聞曰文 廉方公正曰忠)’의 뜻을 따라 문충(文忠)으로 시호를 삼자고 했으나 훈구파에서는 ‘박문다견왈문 거경행간왈간(博文多見曰文 居敬行簡曰簡)’의 ‘문간(文簡)’을 주장하였다. 결국 훈구파의 주장에 따라 문간으로 시호가 결정되었다. 사림파와 훈구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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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 사는 기씨(奇氏)가 이곳에 정자나무를 심었으므로 전라도의 ‘나(羅)’자를 따서 나정(羅亭)이라 하였다. 마을 앞 정자에서 뒷산을 바라보면 비단을 펼쳐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나정 건너 남쪽에 있는 새나정은 약 70년 전에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달리 신나정(新羅亭)이라고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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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나정리에 있는 행주기씨 동성마을. 마을 앞 정자에서 뒷산을 바라보면 그 풍경이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나정(羅亭)이라 하였다. 또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 사는 기씨가 정자나무를 심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1638년(인조 16) 덕산공 기중선(寄重宣)이 처음 들어와 정착한 뒤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기중선은 선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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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나정리 불당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고령군 다산면 나정리를 지나는 하천이라서 나정천이라고 한다. 나정(羅亭)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 사는 기씨(奇氏)가 이곳에 와서 정자나무를 심었으므로 전라도의 나(羅)자를 따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마을 앞 정자에서 뒷산을 바라보니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나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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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는 낙동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고령 지역은 낙동강 총 연장의 20%에 해당하는 55㎞의 연안을 끼고 있어 옛날부터 왜관과 함께 낙동강 중류의 중심 고장이 되었다. 대가야읍 고아리 일대의 지명이 ‘배울’·‘뱃골’·‘주곡(舟谷)’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대가야 시절 배를 건조하던 곳이기도 했다. 고령군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개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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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년부터 757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대가야군(大加耶郡)은 대가야(大加耶)가 신라에 멸망한 562년(진흥왕 23)부터 757년(경덕왕 16)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으로 치소는 대가야읍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진흥왕은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나라 이름을 그대로 군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서는 대가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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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토기나 도자기를 구워 내던 가마가 있던 터. 도요지(陶窯址)는 토기나 도자기를 구워 내던 가마 유적으로, 우리말로는 가마터라고 한다. 토기 및 도자기를 원활하게 생산하기 위해서는 땔감이 되는 산림이 울창하고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제품을 옮기기 편리한 운송로, 양질의 점토와 도토(陶土)가 생산되어야 하는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고령 지역은 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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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에 있던 가야시대~조선시대 나루터. 도진나루터가 위치한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는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 직후 전라도 지방 나씨(羅氏)가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전한다. 당시 사부리 도요지(沙鳧里陶窯址)와 기산리 도요지(箕山里陶窯址)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타지방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진나루로 모여들자 마을 주민들이 많은 이득을 얻어 마을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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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고령 둔덕 지역에서 정기룡 부대가 왜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북상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 계획에 따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군사 1만 명이 의령현과 삼가현을 거쳐 성주 방면으로 북상함과 동시에 배를 통해 낙동강을 올라오기도 하면서 1597년(선조 30) 8월 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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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에 있는 의성김씨 동성마을.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난 직후 전라도 지방에서 나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앞 도진나루터[성산면]를 통하여 성산 사부동 도요지와 성산 기산동 도요지 등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대량 수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왕래하면서 큰 이득을 보았다 하여 득성(得成)이라 하였다. 득성리는 조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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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 지역의 민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는 노래. 경상북도 고령군은 가야 문화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이다. 그리고 고령군은 교통의 중심이기도 하며, 옛날부터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지리적 환경을 감안하면 고령 지역의 민요는 매우 다양하게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민요는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로 구분된다. 노동요는 「모찌는 소리」와 「모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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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산당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구멍 유적. 바위구멍 유적은 바위그림과 함께 소위 ‘성혈(性穴)’이라 불리는 자연 암면에 구멍을 파놓은 유적을 말한다. 이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분포하고 있으며, 컵 마크(Cup Mark), 알구멍 등으로 불리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근래에는 그 성격에 대해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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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아 만든 방어 시설. 성곽(城郭)이란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羅城)을 ‘곽’이라고 한다면, 그 곽의 안쪽에 또 다른 성벽으로 둘러싸 있는 독립된 공간을 ‘성’이라고 한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이란 말이 성곽[口]을 창[戈]으로 지키고 있는 형상을 한 데서도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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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서 김면이 왜선 두 척을 포획한 전투. 2차 무계전투에 대한 기록은 『문수지』와 『용사일기(龍蛇日記)』에만 보이고 『모계일기(茅谿日記)』나 『고대일록(孤臺日錄)』 등의 다른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2차 무계전투의 노획 물품은 개산포대첩의 노획품과 함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졌기 때문에 개산포대첩에서 획득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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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대표하는 도자기 주산지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고령현 소속 공장에 소속된 사람들을 보면 야장(冶匠)·시장(矢匠)·피장(皮匠)·목장(木匠)·석장(席匠)·칠장(漆匠)·유구장(油具匠) 각 1명, 지장(紙匠) 3명, 사기장(沙器匠) 6명 등 모두 16명이다. 이 중 도자기를 제조하는 사기장이 6명으로, 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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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서 손인갑과 정인홍의 부대가 왜군을 물리친 전투.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후 동래로부터 좌·중·우의 삼로(三路)로 갈라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우로의 왜군은 동래-김해-무계-지례-금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를 따라 진군하였고, 경상북도를 장악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개령현에 주둔하고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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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맞서 고령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포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왜군의 주력 부대는 동래-기장-좌수영-울산-경주-영천-의흥-군위-문경의 좌로(左路)와 동래-양산-밀양-청도-경산-대구-안동-선산-상주의 중로(中路), 동래-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성주-지례-금산-추풍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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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령 지역에서 5일마다 열리던 사설 시장. 장시(場市)는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5일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던 시장이다. 성종 초 전라도에서 처음 개설되었다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삼남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장시의 개설 일자는 한 달에 2회, 또는 3회였으나 후기로 내려오면서 6회로 증가하여 5일장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장시는 지역에 따라 일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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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때 고령 지역에서 정기룡 부대가 왜군에 맞서 싸운 전투. 1597년(선조 30) 왜군이 조선을 재침략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8월 초순 왜군이 고령 방면으로 침입하자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고령에서 왜군과 맞서 7월 15일 도진리전투, 8월 7~8일 둔덕대첩, 8월 16일 용담천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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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까지 고령 지역의 역사. 조선시대는 1392년 조선 건국에서 1910년 한일합방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의 역사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지방 제도와 고령, 고령의 향촌 자치, 고령의 경제와 산업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던 조선의 지방 행정 제도는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전국을 8도로 나누는 등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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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2리에 있는 가야시대 토기요지. 합가2리 토기요지는 대가야시대의 토기요지를 비롯한 여러 유적이 공존하는 복합 유적으로 생각된다. 토기를 생산하는 생산 유적과 주거지 등의 생활 유적, 고분군과 같은 분묘 유적이 함께 분포하고 있어 대가야시대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쌍림면에서 합천군 방면으로 넘어가는 국도 33호선을 따라 가다보면 합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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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 있는 가야시대 토기요지. 합가1리 토기요지는 합가리 유물산포지의 분포 범위 내에서 확인되었다. 유적 주변에 토기요지와 함께 소형 돌덧널무덤들이 함께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합가1리 토기요지는 토기를 생산하는 생산 유적과 주거지 등의 생활 유적, 고분군과 같은 분묘 유적이 함께 분포하고 있는 복합 유적이다. 쌍림면에서 합천군 율곡면으로 넘어가는 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