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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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곽장근 |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의 역사에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시대.
[개설]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초기 철기 시대로 세분된다. 덴마크 국립 박물관 초대 관장인 톰센(C. J. Thomsen)은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를 근거로 돌의 시대, 청동의 시대, 철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톰센의 3시대 구분법은 고고학의 문화 단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그러다가 영국의 고고학자 러복(J. Lubbock)이 석기 시대를 뗀석기[打製石器]와 간석기[磨製石器]를 기준으로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누면서 4시대 구분법으로 발전하였다.
군산은 남쪽의 만경강(萬頃江)과 동진강(東津江), 북쪽의 금강(錦江), 서쪽의 연안 항로 등 4개의 옛날 고속 도로를 거느린 교통의 중심지이다. 옛날 고속 도로인 강과 바다는 일찍부터 문물 교류의 큰 통로였다. 우리나라에서 강과 바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천혜의 교역망이 구축된 곳이 군산이다. 그리하여 선사 시대 이래로 줄 곧 군산이 해양 문화의 메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선사 시대 군산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된 내용을 시대별로 살펴보려고 한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기부터 약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이다.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7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면서 주로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았다. 구석기 시대는 인류의 진화 과정과 도구의 발달 정도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군산 내흥동 유적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군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중기~후기 구석기 시대로 추정된다. 군산역이 들어선 군산 내흥동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층과 유기물 퇴적층이 확인되었다. 우리나라 중기~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신생대 제4기 갱신세의 유기물 퇴적층이 확인되었는데,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퇴적층의 연대가 40,000년 이전부터 20,000년까지로 밝혀졌다. 당시의 자연 환경을 복원하는 데 값진 자료인 목재편과 씨앗류가 포함된 퇴적층 바로 위층에서는 석영제 격지를 비롯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그 결과 군산에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결과와 함께 당시의 자연 환경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고고학 자료도 제공해 주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여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었던 시기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물과 식량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고기 잡이와 사냥, 야생식물을 채집하면서 살았다. 간석기와 뼈 연모는 더욱 효과적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토기는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와 화살촉은 제주도를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집터와 무덤, 조개무지 등이 있으며, 서울 암사동과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금강의 관문인 군산은 리아시스식 해안과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좋은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를 증명해 주듯, 1967년 군산도의 선유도 전월 마을 조개무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처음 수습된 이후, 가도와 내초도·노래섬·띠섬·비응도·오식도·개야도 등의 인근 도서 지역에서 대략 30여 개소의 신석기 시대 조개무지가 발견되었다. 흔히 조개무지는 과거 사람들이 굴이나 조개를 까먹고 버린 쓰레기더미를 말한다. 따라서 조개무지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토기류와 석기류, 뼈 도구 등의 다양한 유물뿐만 아니라 집자리와 무덤 등이 함께 조사되어 과거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이다.
군장 국가 공단 조성 지역 내에 자리한 20여 개소의 패총에 대한 구제 발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군산 가도·노래섬·띠섬·비응도·오식도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상대 연대와 절대 연대 측정을 근거로 그 상한 연대가 신석기 시대 전기인 기원전 4,0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다양한 양식의 토기류와 돌화살촉·돌도끼·굴지구·그물추 등의 석기류, 어로 도구인 결합식 낚시와 물고기 해체에 사용된 골각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비응도 조개무지에서는 머리가 없는 사람 뼈와 참돔·민어·복어·상어·돌고래 등의 물고기 뼈와 멧돼지·사슴뼈도 수습되었다. 군산은 신석기 시대부터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양 문화 요소와 금강 상·중류 지역의 내륙 문화 요소가 공존함으로써 신석기 문화의 다양성이 입증되었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구리와 아연 또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인류가 처음으로 금속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가 생산되어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철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까지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농경이 주된 생업이었고, 언덕과 충적지를 중심으로 대규모 취락을 형성하여 정착 생활을 하였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의기(儀器)로 사용되었고, 실제 용구로는 석기·목기·뼈 도구가 사용되었다. 무덤으로는 고인돌[支石墓]과 돌널무덤[石棺墓], 독무덤[甕棺墓]이 가장 대표적이다.
청동기 시대 주요 유적으로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이 있다. 성산면 고봉리와 도암리, 서수면 관원리에서 주거지와 비응도·오식도·띠섬에서 조개무지가 조사되었다. 개정면 아동리와 임피면 축산리에서는 풍화 암반층을 장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판석형 할석을 잇대어 놓은 다수의 돌널무덤[石棺墓]와 독무덤이 조사되었다. 오성산(五聖山)[227m] 등 여러 곳에서 1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서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해 고인돌의 밀집도가 매우 낮다. 아마도 그것은 고인돌보다 돌널무덤 혹은 독무덤을 주된 묘제로 사용하던 세력 집단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오성산과 장계산(長溪山)[110m]부터 영병산(領兵山)[120m]까지 뻗은 산줄기, 개정면과 서수면 일대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한층 밀집되어 있다.
[초기 철기 시대]
초기 철기 시대는 청동 야금술 뿐만 아니라 철의 야금술이 발명·보급되어 철기가 사용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초기 철기 시대는 기원전 4세기부터 서력 기원 전후까지로 설정된다. 초기에는 한국식 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 전국계의 주조 철기가 전래되었고, 한대(漢代)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철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청동기는 쇠퇴하고 명맥만 유지하였다. 동검·다뉴세문경·방울 등 청동 의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철기 생산이 시작되었지만 농기구와 공구류에 한정되었다.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중국 연과 고조선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고인돌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의 재편 과정은 마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성산면 도암리의 집자리에서 초기 철기 시대 원형 덧띠토기[粘土帶土器]가 출토되었고, 서수면 관원리의 제사 유적으로 추정되는 매납 유구에서 검은간토기[黑陶長頸壺]를 비롯하여 동모와 철검이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아직은 초기 철기 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미진하여 군산의 발전상과 사회상을 상세하게 살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