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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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소연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광주광역시의 역사.
[개설]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식민지 통치 지배를 받았던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남도 광주 지역은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양한 변천을 겪었으며,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광주읍성의 해체]
조선시대 읍성은 군사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되었고, 읍성 내에 지배를 위한 주요 시설들과 양반들의 거주지가 있어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었다. 읍성은 일본인들에게도 쉽게 넘나들지 못하는 장벽이었기에 이러한 읍성을 철거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를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광주읍성은 방형(方形)으로 각 방향의 중심부에 성문을 두었다. 동쪽 서원문(瑞元門), 서쪽 광리문(光利門), 남쪽 진남문(鎭南門), 북쪽 공북문(拱北門)의 4대문에 둘러싸여 대략 1㎢ 정도의 크기였다. 1908년에 철거가 시작되어 1916년경 철거가 완료되었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의 개편]
1901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은 41개의 면(面)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는 이 행정구역을 1913년 4월 20개 면으로 줄였다가 다시 15개 면으로 정비하였다. 15개 면은 광주면(光州面), 지한면(地漢面), 석곡면(石谷面), 서방면(瑞坊面), 효천면(孝泉面), 극락면(極樂面), 송정면(松汀面), 서창면(西倉面), 동곡면(東谷面), 대촌면(大村面), 본촌면(本村面), 우치면(牛峙面), 비아면(飛鵝面), 임곡면(林谷面), 하남면(河南面)이다. 지금의 광주광역시의 도시 형태의 시작인 광주면은 성내면(城內面), 부동방면(不動坊面), 기례방면(奇禮坊面), 공수방면(公須坊) 등 4개 면에 19개 동네로 이루어져 있었다.
광주의 지명은 당시 광주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누적된 기억들이 이루어낸 소산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1914년 4월, 광주면의 옛 지명을 버리고 쯔[通]와 죠[町] 등 일본식 지명으로 바꾸어 4개 쯔와 10개 죠, 그리고 5개의 리(里)로 개편하였다. 그 뒤 1930년 4월, 다시 대폭적인 지명 개칭과 가로의 신설 등을 단행하였는데,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부 명칭은 존속되었으나 상당수 지명이 이때 사라졌다. 둘째, 광주면 전역의 동네 이름이 모두 죠로 통일되었다. 셋째, 우리가 '가(街)'라고 부르는 구획 명칭이 죠메[丁目]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붙여지기 시작하였다. 넷째, 지명에서 일본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예컨대 일본 천황의 연호(年號)를 따서 다이쇼쵸[大正町], 쇼와쵸[昭和町]란 지명이 등장하였다. 또한, 전남여자고등학교를 광주아사히[旭]공립고등여학교, 광주여자고등학교를 광주야마또[大和]공립고등여학교라고 부른 것은 모두 학교 소재지의 일본식 지명을 딴 것이다.
초창기 광주면은 성내면, 부동방면, 기례방면, 공수방면 등 4개 면이 연합하여 하나의 면사무소로 통합 운영된 까닭에 '광주연합면'이라고 하였다. 그러다 인구가 늘고 주변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1930년 광주읍이 되었고, 1935년에 광주부(光州府)로 승격되었다. 광주시로 변경된 것은 1945년 8.15광복을 거쳐 대한민국 수립 직후인 1949년부터이다.
[일제강점기 최초로 광주에 정착한 일본인]
1887년(고종 24) 일본 교토[京都] 본원사(本願寺)의 승려인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이 본원사 분원을 건립하기 위해 전라남도 목포에 왔다. 하지만, 목포 주민의 적대감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과거 목숨을 구해줬던 인연이 있었던 윤웅렬(尹雄烈)이 전라남도관찰사로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광주에 왔다. 오쿠무라 엔싱이 윤웅렬을 찾아가 사찰 건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광주 주민의 반감을 우려해 거절하였다. 하지만 오쿠무라 엔싱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 서문 밖 보작촌(洑作村)[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일대]에 땅을 잡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오쿠무라 엔싱의 여동생인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는 우익 단체 고쿠류카이[黑龍會]를 앞세워 광주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오쿠무라 이오코의 둘째 딸 미쯔코[美津子]와 사위 일행도 광주로 합류하게 되어 광주 땅에 10여 명의 일본인들이 들어왔다.
양잠에 정통한 미쯔코와 농업학교 출신이었던 일본인들은 실업학교 설립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일본과 부산 동래에서 인부들을 불러왔다. 1889년(고종 26) 4월, 오쿠무라 이오코가 광주에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광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100명으로 늘어났다. 1889년(고종 26) 11월, '본원사 오쿠무라 실업학교' 를 개교하여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 학생들도 가르쳤다. 조선인을 동화하고 친일 인사를 양성·포섭하기 위해 힘썼으나, 광주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등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켜 얼마 뒤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후 학교 건물은 광주를 드나드는 일본인들의 숙소, 목포영사관(木浦領事館) 소속 일본 순사들의 주재소, 통감부(統監府) 시절 목포이사청(木浦理事廳)의 광주지청으로 활용되면서 광주 지역에 일본 세력을 이식시키는 전진 기지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광주면 인구 및 직업 분포]
1907년 6월, 러일전쟁 이후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많은 일본인들이 오게 되었고, 일본인 소학교도 세워졌다. 1907년 광주면의 면적은 2.14㎢에 전체 5432명의 인구 중 조선인 5039명, 일본인 387명이었던 것이 1914년 비슷한 면적에 전체 1만 655명의 인구 중 조선인 7881명, 일본인 2738명으로 증가하였다. 광주면 전체 인구가 2배 성장하는 동안 일본인 인구는 7배가량 증가하였다. 이후 광주면의 면적과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 1925년 광주면의 면적은 4.5㎢로 넓어졌고, 전체 인구 2만 1028명의 인구 중 조선인 1만 6879명, 일본인 4024명이었다. 1940년 광주면의 면적은 19㎢에 전체 인구 6만 463명 중 조선인 5만 2513명, 일본인 7878명이었다.
1917년 『광주지방사정(光州地方事情)』에 보고된 직업별 호수 및 인구 분포에 따르면 조선인이 1만 5835호, 일본인이 997호로 조사되었다. 직업별로는 조선인 전체 호수의 78%가 농업에 종사하였고, 상업에 종사한 호수는 5.2%이다. 반면 일본인 전체 호수의 약 40%가 상업에 종사하였고, 관공리 28.8%, 농업 20.4%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광주시사』에 따르면 1939년 조선인과 일본인을 포함한 전체 광주 지역의 인구 22.5%가 상업에 종사하였고, 15.2%가 공무·자유업에 종사하는 반면, 농업 종사자는 16.2%로 나타났다. 농업 중심에서 상업과 행정 중심으로 변화된 것이다. 일본인은 전체 일본인 인구 중에 85.1%가 상업, 공업, 공무·자유업에 종사하였다. 조선인은 전체 조선인 인구 중 22.9%가 상업, 18.5%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일제강점기 광주의 독립운동]
일본의 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1919년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3.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장성·화순 등 인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의 만세 시위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주로 기독교계, 유생층, 청년·학생층, 천도교계, 행정기관 하부 관리에 의해 주도되었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다소 약세였는데,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과 한말 의병전쟁의 치열한 전투지로 투쟁 역량이 크게 손실되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29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광주학생운동[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어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 희롱 사건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 오전 '우발적 충돌'이 오후의 '조직적 시위'로 변화되었다. 이후 항일 학생운동은 전국 각지로 파급·확산되었는데, 이때의 학생운동은 대부분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는 전라도를 넘어 전국으로 더 나아가 해외로까지 확산되었다. 1930년 3월까지 전문학교, 중등학교, 보통학교 등 320개 교 5만 4000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광주학생운동으로 582명이 퇴학, 2300명이 무기정학, 1462명이 검거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