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60
한자 四大門-光州邑城
영어공식명칭 Four Gate and Gwangjueupseong[Gwangju-eup Castle]
이칭/별칭 광산성(光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현창

[정의]

고려 말기에 축성된 광주의 읍성과 그 사대문.

[개설]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동과 서남동 일부에 걸쳐 있던 광주읍성으로 고려 시대 말기에 축성하여 일제 강점기 초에 철거되었으며 사대문과 관아 시설을 갖춘 전라남도 행정의 중심지였다.

[광주읍성의 축성 내력]

읍성이란 지방의 부, 군, 현 등 행정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하여 유사시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행정적 편의를 제공하는 성곽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부, 군, 현의 성을 모두 읍성이라고 통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평지나 낮은 구릉 상에 입지하고 판축토성을 쌓았다. 한국에서 순수한 개념으로 읍성이 도입된 것은 고려 공민왕 시대이다. 고려사 열전에 고려말 왜구의 창궐로 인하여 군사적인 측면에서 피난 목적의 산성 방어가 아닌 적극적인 방어체제로 평지에 입지(立地)하여 읍성을 축조한 것이 주된 특징이다. 이 시기에 쌓은 읍성으로는 나주읍성[1376(우왕 2)]과 전주읍성[1388년(우왕 14)], 광주읍성[1378~1379년(우왕 4~5)]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1438년(세종 20)에 『축성신도(築城新圖)』를 반포하여 읍성의 석축화(石築化)를 기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수록된 전라도 읍성 중 광주·전남에 있는 읍 석성(邑石城)으로는 무진[현 광주], 보성, 순천, 광양, 해진[현 해남], 고흥, 장흥, 낙안, 함평 등에 읍성이 있었고, 영광읍성, 구례읍성 등은 이 시기 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읍성에 관한 기록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것이 보이는데, 광주 땅[무진군]에 둘레가 972보인 읍 석성이 있었다. 광주읍성 외에 광주에는 둘레가 2,560보인 무진 도독(武珍都督) 때의 옛 토성, 군의 서쪽에 둘레 625보의 옛 내상 석성(內廂石城)이 있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8,253척[약 2,500m]이고, 높이는 9척[약 2.7m]에 문은 4곳이고, 우물은 100곳이라고 하였다. 이후 『여지도서(輿地圖書)』·『호남읍지(湖南邑誌)』·『광주읍지(光州邑誌)』등에는 성문이 넷임을 추가로 언급하였고, 『광주읍지』[1871] 등에는 성밖에는 탱자울타리와 긴 도랑도 있음을 기록하였다. 『광주읍지』[1925]에는 앞선 『광주읍지』 기록과 같이 "여첩은 없었으며, 성문은 넷인데 동문은 서원(瑞元), 남문은 진남(鎭南), 서문은 광리(光利), 북문은 공북(拱北)인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못은 없다."라고 하였으며, 이 시기에 성은 이미 철거되었다고 하였다. 모두 광주읍성의 연혁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었다.

[광주읍성의 위치]

읍성은 유사시에는 성문을 방어하고, 평상시에는 각종 생활 활동을 관리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입보하여 장기간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주변 지역의 지리 환경과 어우러지는 지역이므로 읍성 지역에는 물사정에 근거한 수자원이 풍부하여 백성들의 거주지와 각종 관리 시설 등을 설치할 만한 적당히 넓고 평평한 지형이 요구된다. 광주읍성지 주변 지역을 이루고 있는 지형 경관과 광주읍성지의 입지와의 관계로 저지대 충적평지는 광주읍성지의 직접적인 입지 지역을 이루고 있고, 산지 지형은 광주 북쪽의 외적으로 보호하는 방어 기능 및 산림자원의 공급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하천은 발달이 미약하여 잠재적 물사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읍성지의 충적지와 구릉지 토양은 배수가 잘되는 사양질 등의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주읍성은 현 광주광역시 동구 동구청앞 교차로와 장동로타리 중간에 있는 광주읍성터[서석동 1002-21]~장동로타리~한미쇼핑사거리~중앙로와 중앙로160번길의 교차로~구시청사거리로 이어지는 성으로 전체적으로 오각형을 이루며 사대문을 갖춘 읍성으로 알려졌다. 광주읍성 안에는 행정동으로 동구 충장동과 서남동 일부에 걸쳐 있으며, 법정동으로는 광산동, 대의동, 궁동, 금남로1-3가, 충장로1-3가, 황금동을 포함한 지역에 해당된다. 이연관(李淵觀)[1857~1935]의 『신묘유서석록』(1891)에서 광주읍성광산성(光山城)이라고 불렀다.

[광주읍성의 조사 및 발굴]

광주읍성에 대한 성곽조사는 1996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여 읍성의 서문지로 추정되는 부근 및 서벽 지역의 일부를 조사하여 다량의 기와와 소량의 토기 및 옹기편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고 보고하였으나 편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1997년에는 서벽에서 남벽으로 이어지는 곳과 남벽의 일부를 시굴 조사를 하였다. 2002년에는 광주읍성 및 성문 유허 복원사업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진남문 주변에 대한 문헌 및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1988~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무진도독고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늦어도 8세기 말 이전에 축조되었으며, 9세기 말에 수축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무진도독고성은 아니지만, 그 배후 산성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어 광주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2002년 『광주읍성유허 지표조사보고서』에서는 '1378년(우왕 4), 1380년(우왕 6), 1381년(우왕 7) 등에 광주에 왜구들이 침입하는 등의 기록과 고려사 열전 설장수전의 사례, 우왕 3년의 사례 등을 들어 고려말 왜구의 창궐한 시기에 축성하였을 것'으로 보고, 광주읍성은 고려 말기 왜구 침입의 치성기(熾盛期) 또는 조선 초기[세종대 이전]의 어느 시기에 축성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광주읍성의 철거는 1907년 내각령 제1호'성벽처리위원회규정'이 발표부터 1916년까지 8년에 걸쳐 철거가 거의 완료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2008년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적으로 조사지역은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3번지 일원이며 구 전라남도청·전라남도지방경찰청이 자리하고 있는 광주의 행정 중심지였다. 이 조사는 1, 2구역으로 나누어 1구역은 광주읍성을 중심으로 하여 건물지, 석열, 담장지 적심석 등이 확인되었고, 2구역은 부지 전체에 대한 시굴 조사와 함께 구 보이스카웃광주전남연맹 사무실 주위를 조사하여 담장지와 우물 근현대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그 결과 광주읍성은 석재와 흙을 이용하여 만든 평지성으로 모를 죽인 방형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광주읍성의 남서쪽 지역의 방형의 곡선 지점을 조사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규모는 약 230m 높이의 7단이 남아있어 성벽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머지 구간은 기단부와 약 1~2단의 성벽의 형태가 남아 있어 전반적인 광주읍성의 축성을 추정할 수 있었는데, 광주읍성 조사구역 약 85.1m의 제원은 외벽 잔존 최대 높이가 약 70㎝, 잔존 최대 높이 기단 포함 7단, 중축한 내외벽 구간 너비 약 70㎝, 내벽 잔존 최대 높이가 약 60㎝, 잔존 최대 단수 1단 이상, 중·보축한 구간 너비 약 230㎝이었다. 면석은 가로 눕혀쌓기를 교차하면서 축조하였는데, 뒤채움은 일정한 높이[약 70㎝]까지 소형 석재를 이용하여 내벽[2단]까지 채우고, 다음부터는 흙과 소형 석재를 번갈아 뒤를 채우면서 축조하였던으로 보았다. 단면상으로 광주읍성을 살펴보면 평탄한 평지에 내외벽의 면석을 두고 기단부를 조성하고 내부는 소형 석재를 채운 형식이었다. 위에는 다시 수직으로 외벽을 쌓고 내부는 흙과 소형 석재를 번갈아 가면서 뒤채움을 하였으며 내벽은 1단의 기단부 위에 1~2단의 판판한 석재를 수직으로 쌓고, 다음 단에서부터 내부쪽으로 경사지게 다진 협축 형식을 취한 내탁식성(內托式城)으로 추정되었다. 광주읍성의 견고성과 전망을 위하여 동벽으로 연결되는 모서리의 곡선이 시작되는 곳에 치(稚)를 설치하는 문제는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두었다. 내벽에서 약 3m가량 떨어져 덧대어진 구조물은 성벽과 나란하게 떨어져 있고, 계단상으로는 채움석이 형성되어 있었다. 4개의 성문 시설은 진남문으로 조사가 제한되어 성문을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증축된 성 외벽에 문초석으로 추정되는 성돌 2점이 확인되었다.

[광주읍성의 형태]

광주읍성의 형태에 대한 고지도의 기록으로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輿地圖)』, 『비변사인 방안지도』, 『광여도』, 『지승』, 『1872년 지방지도』 등에서 광주읍성 형태를 사각형으로 묘사하였는데, 『1872년 지방지도』에는 모서리가 각진 방형이고, 나머지는 성의 모서리가 둥근 형태이다. 1879년 『광주읍지도』에서는 광주읍성을 둥그스름한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1912년 지적도[1:1200]』에 의하면 광주읍성의 모서리가 모두 둥그스름한 형태이다. 서북쪽 모서리의 북성정(北城町) 36번지와 37번지 사이에 있는 도랑은 조탄보에서 경양지로 유입하는 호숫물 수로였다. 일제 강점기의 일부 지도에서는 이 수로 안쪽으로 성 모서리로 짐작되는 그림도 있다.

[광주읍성의 사대문]

광주읍성사대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동국여지지』[1660~1674]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4대문에 대한 기록은 단지 동루, 서루, 남루, 북루로 소개되어 있다. 광주읍성에는 동서남북 사면의 성벽 중앙에 대문이 있었는데, 대체로 고지도에 그려진 4대문 양식이 각각 다르게 표현되었다. 『광여도』에서는 북문을 평거식으로, 나머지 동, 서, 남문을 홍예식으로 그렸다.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남문과 북문이 홍예식으로, 동문과 서문은 개거식으로 표현하였고, 『여지도』는 성문을 모두 개거식으로 그렸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은 지도 제작자의 이미지상의 표현일 가능성이 있다.

광주읍성 북쪽 대문이 공북문(拱北門)으로 광주에서 가장 중요한 문인데 그 의미는 "북쪽[임금]을 공손히 받든다."는 뜻으로, 오횡묵은 "북두(北斗)에 의지하여 서울의 영화를 바란다."라는 의미의 편액이라고 하였다. 공북문은 1910년대에 철거되었는데 철거 전에 남긴 사진에 의하면 공북문은 2층 문루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았고 그 좌우 양쪽 칸에는 널판을 세워 막았다. 2층은 마루를 깐 다락 형태인 팔작기와지붕이다. 공북문은 중앙로와 충장로가 만나는 충장로3가 충장치안센터 사거리 일대에 있었다. 공북문 밖에는 장성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 국도 제1호선 상에 충장로5가독립로가 만나는 지점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절양루(折楊樓)가 있었다. 이별과 재회를 상징하는 절양루는 북쪽에서 오가는 손님을 송영하는 곳이고, 호남의병들의 출정지였다. 별칭인 공북루(拱北樓)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 공북루 북쪽 유림숲은 1960년대 이후에 사라졌다.

광주읍성 동쪽 대문은 서원문(瑞元門)이다. 광주의 별칭인 서석과 동쪽이라는 의미의 원(元)을 결합하여 지은 이름으로 '좋은 기운이 깃드는 문'의 뜻이다. 1914년 지적원도 『일제 지적도[1:1200]』에 의하면 광주중앙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성벽은 전남여자고등학교 후문통 근처에서 동쪽으로 약간 튀어나오면서 광산동으로 내려간다, 서원문은 현 제봉로와 서석로85번길의 교차 지점 근처에 있었다. 박선홍이 서원문으로 추정한다는 1913년 사진이 남아 있다. 동문 밖에 있던 전남여자고등학교 후문 안과 대의동 41번지에 있던 두 장승은 현재 전남대학교 대강당 앞에 전시되어 있다.

광주읍성 남쪽 대문은 진남문(鎭南門)이다. 진남은 남쪽 일본을 누른다는 뜻이다. 진남문은 현재의 광주 동구 문화전당로35번길과 문화전당로가 만나는 지점 문화전당 매표소 남쪽 어린이놀이시설 일원에 있었다. 진남문 안에 있던 광명석(光明石)은 현재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정에 있는 진남비(鎭南碑)이다.

광주읍성 서쪽 대문에는 최종기(崔宗岐)가 쓴 광리문(光利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리(利)'는 주역에서 서쪽 방위를 의미하는데, 광리의 의미는 '좋은 기운을 받아 일마다 잘 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광리문은 서석로7번길 동쪽 끝지점과 남북으로 흐르는 중앙로160번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목포 쪽에서 들어오는 첫째 길목이다. 1900년대에 일본인들이 광리문으로 들어와 광리문 일대에 일본인들의 유곽과 술집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일찍 철거되었다. 광리문 안쪽에는 주민들의 세금과 군역 자료의 근거가 되는 호적 관계 서류를 보관하는 별도의 건물로 1층을 누상고(樓上庫), 2층을 누하고(樓下庫)라고 하였다.

광주읍성의 발굴조사보고서 『광주읍성1,2』에서 '광주무오(光州戊午)', '광주기미(光州己未)' 등 명문 기와편과 고려~조선 초기 자기편 등 출토 유물에 근거하여 광주라는 명칭으로 개편된 시기 등을 근거로 1378년(우왕 4) 우왕 연간에 광주읍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광주읍성의 내부 시설]

광주읍성 안에는 『1872년 지방지도』에 많은 건물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고지도마다 각각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성 안에 동문에서 서문으로, 북문에서 남문으로 십자형 대로가 그려져 있다. 이 십자로를 경계로 네 구역으로 구분된다. 남문과 동문 사이 아사 구역에는 제금루를 지나서 삼문(三問) 담장 안에는 내아, 동헌, 국재 등 건물 6채가 있고, 담장 밖으로 군청, 훈도청, 형청, 작청, 주청, 해현청, 장방이 있다. 동문과 서문 사이에는 제금루에서 나온 길을 따라 북문내 구역으로 들어서면 황화루(皇華樓)를 지나 외삼문을 낀 담장 안에 객사가 있다. 동문과 북문 사이의 서문내, 고촌 구역에는 군기, 화약고, 전제소, 관덕정, 수성청, 기고청, 돌양광, 좌기청, 창고가 있으며, 서문과 남문 사이 성내면 구역에는 남문내와 사정리로 나뉘었는데 이 구역에는 형옥, 보관청, 교장청, 장청, 봉공청 등이 있다. 『광주읍지』[규 10849]에는 내아, 관덕정, 지방대, 경무청, 선화당, 광산관, 황화루, 동헌, 주사, 서기청, 서청 등이 있다. 『조선지지 자료』에는 성내면 사정리에 고향교평(古鄕校坪)이라는 옛 땅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장원봉 아래에서 광주성 안으로 옮겼다는 광주향교가 성내면 사정리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면은 광주천의 홍수 피해가 극심하였던 곳이었기에 광주향교를 다시 성거산으로 옮겼다. 『광주읍지』(1879) 지도에는 하모당, 관덕정, 향청, 객사, 훈련청, 사창 등이 있다. 『지도군총쇄록』[1896]에는 관아의 추녀에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현액이 있으며, 서석헌 문미에 하모당이 있고, 내아의 뒤에 신향각이 있다고 하였다. 객사의 이름은 광산관(光山館)이고, 객사 옆에 있는 활 쏘는 정자는 본래 희경루(喜慶樓)였는데 19세기 이후로 관덕정으로 바뀌었으며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희경루 방회도』에서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광주읍성의 모습은 성곽 일부만 잔존할 뿐 광주읍성은 헐리고 없으며, 사대문광주읍성의 내부 시설도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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