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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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新昌洞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512-1 |
시대 | 선사/철기,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노성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2년 - 광주 신창동 유적 1차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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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92년 9월 9일 - 광주 신창동 유적 사적 제375호 지정 |
현 소재지 | 광주 신창동 유적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512-1 |
성격 | 유물 산포지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철기시대 말기에서 원삼국시대 초기에 걸친 농경 복합 유적.
[개설]
광주 신창동 유적은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과 생활 그리고 무덤의 실상을 알려 주는 거대한 농경 복합 유적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으며, 영산강변에 낮게 솟은 삼각산[276m]에서 영산강[115.5㎞]의 서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자락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호남고속도로가 유적의 중심부를 지나가고 있다.
광주 신창동 유적은 1962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팀이 53기의 독널무덤[옹관묘]을 발굴 조사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그 뒤 국도 제1호선 도로 개량공사가 진행되면서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긴급 조사를 시행하였다. 조사 결과 토기 가마, 저습지, 밭 경작지와 주거지 등이 확인되었고, 빗, 칠기 고배 등의 목칠제 유물과 굽다리접시,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등의 각종 토기류 등이 발견되었다. 1992년 1차 발굴 조사에서 신창동 유적의 학술적·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2년 9월 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유적 발굴은 2012년까지 12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발굴이 진행될 때마다 최고(最古)·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많은 양의 유물이 쏟아졌다. 1995년 발굴에서는 발화구, 신발골, 문짝 등 건축 부재와 각종 씨앗 등이 출토되었고, 1997년에는 수레 부속구, 따비, 현악기, 바디[베틀, 가마니틀, 방직기 따위에 딸린 기구의 하나]와 실감개 등 우리나라 최고의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이후 계속된 발굴 조사를 통해 150㎝에 달하는 벼 껍질층, 칠기와 칠기를 만드는 도구, 천 조각 등 생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 현악기, 베틀 부속구인 바디, 수레 부속구는 광주 신창동 유적 발굴 3대 주요 유물로 특히 유명하다.
[위치]
광주 신창동 유적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역사문화공원 동쪽 호남고속도로 근처에 있다.
[현황]
광주 신창동 유적은 발굴 조사 이후 다시 흙으로 덮어졌고 현장에는 대형 안내판만 서 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현악기 등 출토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 최초로 다양한 유물이 발굴된 저습지 유적으로 학술·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