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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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相基 |
영어공식명칭 | Yang Sanggi |
이칭/별칭 | 설죽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문다성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 양상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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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양상기 광주경찰서 순사 근무 |
몰년 시기/일시 | 1910년 8월 1일 - 양상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양상기 건국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양상기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2011년 - 광주광역시 북구 도로명 '설죽로'로 명명 |
출생지 | 니동리 - 광주광역시 북구 향토문화로 22-1[중흥동 494-3] |
학교|수학지 | 풍정암 -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 |
활동지 | 동복현 서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서리 |
활동지 | 담양 덕곡리 -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 |
묘소 | 백마산 -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151-9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근대 개항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의병장.
[가계]
양상기(梁相基)[1883~1910]의 본관은 제주, 호는 설죽이며 아버지는 의병장 양진여(梁振汝)이다.
[활동 사항]
양상기는 1883년(고종 20)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양진여가 세운 담양의 풍정암(風征庵)[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에서 수학한 후 전라도 광주 진위대(鎭衛隊)에서 병사로 복무하였다. 1907년 9월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아버지 양진여의 의병활동을 돕기 위해 위장으로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었으나 1908년 4월 면직되었다. 1908년 5월부터 의병장이 되어 40명의 의병을 이끌었으며, 의병이 최대 80여 명까지 늘어나기도 하였다. 양상기의 의병 부대에는 도총장 안판구(安判九), 후군장 이문거(李文擧), 포군장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 조사윤(曺士允), 참모장 유병기(劉秉基) 등이 임명되었으며, '대한제국의 복구'를 주창하며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헌병분견소 방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09년 4월 동복현 서촌[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서리]과 5월 담양 덕곡리[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서 일제와 큰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하면서 1909년 6월에 부대를 해산하였다. 1909년 12월 전라북도 남원에서 일제에 체포되었으며,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사건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하였지만,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동일한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1910년 8월 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2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묘소]
양상기와 아버지 양진여의 묘역은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151-9[백마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양상기에게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1년 광주광역시 북구에서는 도로명 주소를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양상기의 의병활동을 기리고자 신안 제1교에서 일곡동의 일곡교차로까지 6.6㎞의 도로명을 양상기의 호를 따서 ‘설죽로(雪竹路)’라고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