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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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七松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73[광산동 59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숙 |
건립 시기/일시 | 1650년 - 칠송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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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05년 - 칠송정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2년 - 칠송정 재중수 |
현 소재지 | 칠송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73[광산동 599] |
원소재지 | 칠송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73[광산동 599] |
성격 | 누정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행주기씨 문중 |
관리자 | 행주기씨 문중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개설]
칠송정(七松亭)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장남인 함재(涵齋) 기효증(奇孝曾)이 복룡산 아래에 건립하였다. 기효증은 부친이 별세하자 광곡마을 백우산 밑에 온돌이 있는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기효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활동으로 공훈이 있어 선조로부터 벼슬을 하사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학문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를 기리고자 움막 옆에 충절을 상징하는 7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칠송정’이라 이름하였다.
지금의 정자는 1650년경 새로 신축되었다.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행서로 쓴 칠송정 현판과 후손인 기동준[1860~1918]이 쓴 「칠송정 중수기(七松亭重修記)」와 8세손인 기봉국의 ‘호산승처필명정(湖山勝處必名亭)’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외 칠송정기를 기록한 비석이 정자 옆에 세워져 있다. 현재 7그루의 소나무는 없어졌지만, 정자 주변에는 거목인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둘러서 있다. 기씨 문중에 보관 중인 기효증의 『근왕록(勤王錄)』에는 창의병장(倡義兵將)으로 의병 400명과 군량미 3,200석을 모아 바닷길로 임금이 있던 용만(龍灣) 의주까지 수송하였던 내역 등이 기록되어 있다.
[위치]
칠송정은 광산구 광산동 월봉서원을 들어서기 전, 왼편으로 고봉학술원을 지나면 보이며 작은 다리 건너편에 있다.
[변천]
칠송정 자리에는 기효증이 시묘살이를 하던 움막이 있었고 지금의 정자는 1650년에 건립되었다. 칠송정은 이후로 몇 차례 중수되었다.
[형태]
칠송정은 중앙에 우물천장,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자연석 외벌 기단과 정평주초석 위에 원형 장초석과 원형 기둥을 세웠다. 바닥 전체를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에 3층 계단을 놓아 오르게 하였다. 방을 들이지 않아 공간이 크고 개방되어 있다. 마루 끝 3면에 머름대를 놓고 연화형 난간청판(欄干廳板)으로 장식해 단아한 격조가 있다. 이고주 오량집[二高柱五樑架]으로 긴 처마를 겹차미로 전통 한옥의 곡선인 후림을 주었다.
[현황]
칠송정은 행주기씨 문중과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에서 관리하고 지원하고 있으나, 근래에 관리가 허술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칠송정은 효와 충절을 올곧게 실천하였던 선조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 지식인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