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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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笙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경 |
[정의]
[개설]
봉생정(鳳笙亭)은 절양루(折楊樓)[지금의 공북루(拱北樓)], 황화루(皇華樓)와 함께 조선 초기인 1415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571년 유희춘(柳希春)[1513~1577]은 전라도 관찰사로 지방을 순행하며 광주 지역에도 몇 차례 들렀다. 7월 28일 유희춘의 일기에 따르면, 희경루에서 관찰사인 유희춘, 병사 임진(林晉), 좌수사 김오(金鋘), 우수사 한홍제(韓弘濟) 등 4사(使)가 회동하였는데, 미리 와 있던 우수사 한홍제는 봉생당(鳳笙堂)에 머물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공무를 위해 출장 온 관리가 잠시 머무는 장소로 봉생정을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치]
봉생정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2가에 있었다.
[변천]
봉생정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나오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지금 없어졌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숙종 대에서 영조 대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봉생정과 관련된 시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봉생정을 설명하며 영의정에 오른 정창손(鄭昌孫)[1402~1487]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황화루형압고대(皇華樓迥壓高臺)[황화루가 아득히 고대(高臺)를 누르니]
대반군화독자개(臺畔群花獨自開)[고대 주위에는 꽃만이 제대로 피었구나]
봉거유유종불반(鳳去悠悠終不返)[봉황은 날아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공여쌍수송청래(空餘雙樹送靑來)[부질없이 남은 한 쌍의 나무가 푸르름을 보내오는구나]
또 봉생정은 광주목사를 역임한 신응시(辛應時)[1532~1585]가 지은 「광산(光山)」이라는 시에도 등장하고, 허균(許筠)[1569~1618]의 시 「광주서사(光州書事)」에도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