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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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皇華樓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수경 |
[정의]
조선시대 광주읍성 내 객사인 광산관(光山館) 정문에 있었던 2층 누각.
[개설]
황화루, 공북루, 봉생정, 희경루, 제금루 등은 관아의 누정이다. ‘황화(皇華)’는 고대 중국의 고전 『시경』에 나오는 말로 칙사나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환영의 의미로 부르는 「황화곡(皇華曲)」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위치]
황화루는 옛 전라남도청과 광주천의 서석교 사이를 잇는 도로인 서석로 옆에 있었다.
[황화루에 관한 기록]
오횡묵(吳宖黙)[1834~?]은 1896년 광주읍성과 관아 시설물에 대한 기록을 자세하게 남겼다. “서문에 들어서니 광리문(光利門)이라 편액을 걸어놓았다. 객사 문루 아래 이르러 가마에서 내렸다. 문루에는 황화루(皇華樓)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조금 후에 수배(隨陪)가 와서 이르기를 편복(便服) 차림으로 맞아들이라고 하였다 하여 곧 외삼문으로 나아갔다. 편액은 광주도회아문(光州都會衙門)이라 걸려 있다. 객사에서 관문에 이르기까지 길 북쪽에는 철비 23개, 석비가 16개가 세워져 있는데 모두 전직 태수의 유애비(遺愛碑)[송덕비(頌德碑)]이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영에 들어가 관찰사를 만났다. …”
이처럼 황화루는 임금의 칙사, 정부 고관, 기타 내외 귀빈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오횡묵은 『여수군총쇄록』에 「광주 황화루 아래에서 읊다(光州皇華樓下有吟)」라는 시를 남겼다.
[변천]
1760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 1879년과 1924년의 『광주읍지(光州邑誌)』 등에 따르면, 1751년에 광주목사로 부임한 김시영(金始煐)이 객사, 관덕정, 황화루를 중수하였다. 광주 객사 광산관(光山館)은 대한제국 시절에 재무감독국, 일제강점기에 광주군청 등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을 잃어가다가 1920년대에 철거되었는데 황화루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13년 일제는 이 누각을 뜯어다가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에 있던 옛 광주형무소 앞으로 옮겨 간수[교도관] 훈련소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