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72
한자 許百練
영어공식명칭 Heo Baekryeon
이칭/별칭 의재,최후의 남종화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허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연표보기 - 허백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허백련 일본 니가타에서 개인전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허백련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시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허백련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동양화부 최고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허백련 연진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허백련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허백련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추천 작가·초대 작가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허백련 문화훈장 문화포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6년 - 허백련 예술원상 미술 부문 수상
몰년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허백련 사망
출생지 전라남도 진도군
성격 동양화가
성별
본관 양천
대표 경력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설립자|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정의]

한국 남화가 남도의 전형 화풍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여하였으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

[개설]

허백련(許百鍊)[1891~1977]은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의재(毅齋)이다. 허백련의 산수화는 1920년대 전통적인 남화(南畵) 중에서 개성 있는 화풍을 보여 주었으며, 호남 지방의 실경을 바탕으로 한국적 남화인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렸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을 거점으로 호남 지역 남종화(南宗畵) 화맥을 이끌었다.

[활동 사항]

허백련은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중반 한국의 남종화를 전승시키기 위해 미술 단체인 '연진회'를 발족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 최초의 미술인 단체였던 '연진회'는 1938년 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허백련이 중심이 되어 친목 단체로 출발하였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에 설립된 연진회는 "서화를 연마함으로써 진경에 들거나 양생을 진원에 이르도록 한다."라는 허백련의 인격 도야라는 가르침을 좇아 전통적인 남종화의 고전적 정신과 화법을 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백련 문화생들의 모임이다.

허백련은 진경을 터득한 후에 마음의 산천을 그리는 것이 진정한 남종화라고 믿었고, 이는 바로 허백련의 산수화에 대한 기본 관점인 동시에 허백련이 주장하였던 전통을 지키는 일이었다. 즉, 연진회의 실질적인 지주였던 허백련의 지도 이념은 '전통 남종화의 부흥'이었다. 연진회 회원들은 서화 수련과 함께 일제 식민지 정책에도 반대하여 창씨개명 등의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허백련의 청년기는 지성을 갈구하던 학업에 귀의하였다면, 장년기는 예술 인생으로서 입신의 활보였으며, 중년기에는 일제의 강압 통치로부터 저항의 행보를 보였다. 광복 이후인 1946년에는 작업 공간을 무등산 춘설헌에 마련하고 거쳐를 옮겨 197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통 회화에 관한 확고한 의지를 고수하였다.

'조상 숭배', '이웃 사랑', '땅의 풍요' 의 삼애(三愛) 정신을 바탕으로 식민지에서 벗어나 민족의 빈곤한 의식과 가난한 삶을 극복할 수 있도록 1945년 삼애학원, 1947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또한 194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산 151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삼거리에서 증심사까지 약 4㎞의 길은 현재 '의재로'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증심사 방향의 소태동 751에 '의재창작스튜디오'가 있다.

[저술 및 작품]

허백련의 주요 작품으로 1925년 「사계산수」, 1926년 「청산 백수」, 1940년 「춘경산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문화훈장 문화포장(文化褒章), 1966년 예술원상 미술 부문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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