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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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寅世 |
영어공식명칭 | Jeong Ins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09년 8월 27일 - 정인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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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정인세 소년잡지 『새동무』 발간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정인세 광주YMCA 주일학교 강사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정인세 광주YMCA 총무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1948년 - 정인세 광주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교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64년 - 정인세 귀일원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1991년 4월 29일 - 정인세 사망 |
출생지 |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
성격 | 복지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동광원 원장|광주YMCA 총무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체육인이자 종교 지도자.
[개설]
정인세(鄭寅世)[1909~1991]는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지금의 서울특별시 마포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YMCA에서 유도와 덴마크식 기계체조를 가르치고, 광복 후 동광원(東光園)이라는 고아원 원장을 지냈으며, 정신질환자의 안식처인 귀일원(歸一園)을 세웠다.
[활동 사항]
정인세는 서울YMCA 체육관 유도부 반장으로 김후옥·이인덕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서울YMCA 체육부 간사이며 스승이었던 현동완의 가르침과 신앙 지도에 따라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30년 김태오, 이택규 등과 소년잡지 『새동무』를 발간하였다.
1932년 김후옥 모친의 권고로 전라남도 광주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광주YMCA 청년부 간사와 유도부 사범을 맡아 유도와 덴마크식 기계체조를 가르쳤다. 수피아여학교 농구 코치로도 활동하였다. 1935년 광주YMCA 주일학교 강사로 활동하며, 농업실습학교 학감 일을 맡아서 어비슨(Gordon Avison) 선교사를 돕기도 하였다. 광주YMCA는 야구, 축구, 정구 외에 권투, 유도, 체조 등을 청소년들에게 보급하였는데, 권투는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을 씻는데 도움이 되어 인기가 높았다. 1936년 27세 때 수피아여학교 출신 최병준 목사의 딸과 결혼하였다.
1939년 일제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미국 스파이 사건을 조작하여 많은 기독교인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는데, 이때 정인세는 백영흠, 김천배, 조아라, 김현승 등과 함께 구속되어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41년 강순명 목사와 활동하던 중 동광원 설립자인 이현필을 만났다.
1945년 광복 후 광주YMCA 회장 최흥종 목사를 도와 총무를 맡게 되었다. 그 후 광주YMCA 3대 총무에 재임명되었다. 1947년 6월부터 1948년 10월까지 백영흠 목사가 광주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장을 할 때, 정인세는 교감으로 시무하였다.
1950년 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YMCA를 중심으로 6.25전쟁 후 전쟁고아를 수용하기 위해서 유지 70여 명이 힘을 모아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웠다. 이현필은 정인세에게 편지를 보내 동광원의 원장을 수락하도록 설득하였다. 이후 정인세는 20여 년간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1964년 동광원 원장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에 정신질환자의 안식처인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을 세워 정신질환자를 살폈다. 1991년 4월 29일 광주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