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광명문화대전 > 광명의 마을 이야기 > 철산동 > 철산동이 철산리였을 때 > 아파트 단지 뿌리에 흐르는 철산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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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산1동부터 철산4동까지로 구분되어 있는 철산동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이름과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에는 지금의 철산1동, 철산2동, 철산3동, 철산4동과 도덕산 자락이 각각 사성[일명 뱀수], 모세[일명 연서], 쇠머리, 왕승골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마을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이름과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시흥군 서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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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산동 쇠머리 지역은 예부터 덕수장씨 일족이 모여 살던 세거지였다. 덕수장씨 가문이 철산2동에 정착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한 충의공 장응기(張應箕)의 영정을 그의 넷째 아들 장준(張晙)이 옮겨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장준의 후예들은 충의사라는 사당을 건립해 대대로 제를 지내 왔다. 철산주공12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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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하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철산동의 옛 모습은 지적원도나 1980년대 항공사진을 통해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광명 동부 지역을 유유히 흐르는 안양천도 일제강점기 둑을 쌓아 직강화하면서 철산동 지형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철산동은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농촌의 형태를 유지해오다가 1984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택지와 상업 지구, 도로 등이 건설되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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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산동의 광명시민회관 전시실 입구와 광명시민운동장 사이 자그마한 녹지 사이에는 장방형의 육중한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이 바위는 ‘철산동 고인돌’로 알려진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철산동 고인돌은 보통 덮개식이라 말하는 북방 양식으로, 육중한 덮개돌과 상대적으로 작은 받침돌 2개로 이루어져 있다.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2007년 주변 재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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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 서울특별시는 급격히 도시화가 되었고, 지방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게 되자 심각한 주택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과 인접한 교외 지역을 일방적으로 서울특별시로 편입하면서 행정 구역을 확대해 나갔다. 서울 교외 지역을 도시화하여 인구를 서울 외곽으로 분산시켜서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