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623 |
---|---|
한자 | 弓項里下弓項陶窯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22-2 전|궁항리 산 11 임|궁항리 산 72 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윤성준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전주 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
---|---|
소재지 |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22-2전 |
소재지 |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산11임 |
소재지 |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산72임 |
성격 | 가마터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에 있는 조선 시대 가마터.
[개설]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는 조선 시대 백자를 생산하였던 가마터로 3개소가 존재한다. 이를 편의상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A,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B,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C라 한다.
[변천]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에 대한 문헌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요지에서 확인되는 유물의 양상을 통해 17세기에서 18세기 대에 요업 활동이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도요지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마을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정수암 터이다. 이 사찰의 정확한 유래와 창건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6·25 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정수암 터에 새롭게 사찰이 세워져 있어 확인할 수 없으나,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제작을 위한 2006년의 지표 조사에서 이곳에 3개의 축대가 남아 있었고 주변에는 수파문 계통의 기와 조각들이 산재해 있음이 확인되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정수암에서 흘러 내려 온 쌀뜨물이 정자천을 덮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처럼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면 많은 양의 반상기들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궁항리 일대의 도요지는 정수암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위치]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는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22-2전, 궁항리 산11임, 궁항리 산72임에 있다. 전주에서 진안 방향의 국도 26호선을 따라 가다보면 봉암 교차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궁항리 방향으로 약 1.5~2㎞ 정도 올라가면 하궁항 도요지가 나온다.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A와 B는 하궁항 마을 북쪽 기동골 기슭 내에 위치하는데, 북일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포장도로에서 북쪽 밭 일대가 하궁항 도요지 A, 남쪽 산사면 일대가 하궁항 도요지 B이다.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C는 하궁항 마을에 조성된 여산 송씨 일가 분묘군 일대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는 전주 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2006년의 지표 조사 중 발견한 유적으로 정식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황]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A와 B는 약 100m 거리를 두고 인접해 있다. 하궁항 도요지 A는 밭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장기간 훼손되었다. 전주 대학교 박물관의 지표 조사에서 가마 폐기물과 자기 조각들이 둔덕을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궁항 도요지 B는 산의 경사면에 유물이 수습되면서 확인되었는데, 가마는 산의 경사면을 따라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추측된다.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 C는 여산 송씨 일가의 분묘군에서 확인되는데, 포장도로와 분묘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가마는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궁항리 하궁항 도요지에서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제작된 백자들이 채집되었는데, 기종은 내저원각이 있는 접시·대접·발 등 다양하며, 굵은 모래를 받쳐 포개 구이하였다. 그밖에 직경 10㎝ 이상의 원반형 도지미와 요벽체 등도 발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궁항리 일대의 도요지들은 정자천을 끼고 동쪽과 서쪽 일대에 분포한다. 특히 궁항리 일대는 산악 지대가 발달되어 숲이 울창하다. 따라서 가마를 운영하기 위한 땔감을 공급하는 데 있어서 천혜의 자연 조건을 지닌 곳이다. 또한 정자천을 끼고 있어 자기의 운송이 편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천은 부귀면 궁항리 운장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봉암리·거석리·수항리·황금리·두남리를 지나 정천면 월평리와 갈용리·모정리 등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궁항리 일대의 백자 가마에서 확인되는 백자는 모두 제작 기법이 동일하다. 따라서 궁항리 일대의 백자 가마들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관요의 백자 제작이 차질을 빚고, 금속의 부족으로 인해 백자 수요가 증대하여 민간에서의 백자 제작이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또한 17세기 이후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상품 유통의 증대도 민간에서의 백자 제작을 가속화시켰다. 궁항리 일대에서의 백자 제작은 이와 같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가마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