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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거열산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264
한자 居昌居列山城
영어음역 Geoyeolseong Fortress
이칭/별칭 진주성,건흥산성(乾興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정의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일시 1974년 12월 28일연표보기 - 거창 거열산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22호 지정
문화재 지정일시 2020년 9월 24일연표보기 - 거창 거열산성 사적 제559호 승격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거창 거열산성 사적 재지정
성격 성곽|성
건립시기/연도 삼국시대
높이 8m
둘레 약 2,100m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산 45-1 일대
소유자 국유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개설]

경상도 지방에서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의 영역이었으며 이것은 서부 경상남도에서 거창, 산청, 진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4세기경으로 편년되는 평면 타원형의 주거지의 분포 상황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야의 영역이었던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 후기에 이르러 영역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방 통지조직 중 삼국통일 직전까지의 주치 치폐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

신라는 진흥왕 16년(555)에 지금의 창녕인 비사벌에 완산주를 두었다가 동왕 26년(565)에는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를 두었고 진덕왕 2년(648)의 기록에는 대야주가 대양주로 표기되어 있으며 문무왕 1년(661)의 기록에는 하주를 두었다. 옛 변한지역인 가야지역은 대야주라 하다가 대양주가 된 합천과, 완산주라 하다가 하주가 된 창녕 등 2개 주만이 신라에 편입되어 있을 뿐, 지금의 함안 서남쪽인 진주지역이 신라의 주치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사를 통하여 지금의 진주지역은 본시 신라령이 아닌 백제령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진주가 본시 백제 거열성이라고 한 것은 상당한 근거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진주지역이 고고학상으로 문무왕 이전까지 백제지역이었다고 단정지을 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사실 지금까지 진주지역에서 발굴조사된 삼국시대의 유적은 옥봉고분군, 수정봉고분군, 가좌동고분군, 중안동고분군 등으로 대개 6세기를 전후로 하는 신라의 색채가 강한 가야의 고분이며 그다지 많은 유적군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명칭유래]

거열성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남아 있는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건치연혁조에는 「本百濟居列城一名居陀 新羅文武王取而置州 神文王分居陀州置晋州摠管 景德王改康州 惠恭王復爲菁州」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조선시대에 편찬되는 각종 지리지에 인용되고 있는데 이 거열성은 『삼국사기』 문무왕 3년 조에는 백제 거열성을 공취하였다는 기사로도 남아 있어 이상과 같은 기록만으로 보면 진주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문무왕 연간에 이르러 신라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거창군 건치연혁조에 「本新羅居烈郡一名居陀 景德王改名 今名高麗顯宗屬陜州明宗始置監務」라고 하여 거창의 명칭이 진주와 같은 거타임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이 되기 이전에 진주와 거창이 거타라는 동일한 지역에 속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거열산성이 거창에 남아 있으며, 이 성의 축성시기가 삼국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건립경위]

정확한 축조연대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이 지방은 신라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인 만큼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나 백제의 군사에 의하여 쌓아졌으리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신라본기」탈해왕 10년(66)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백제의 거열성을 공취하고 700여 명을 베었다는 거열성이 바로 이 산성에 비정되기도 한다. 한편, 백제의 멸망 후 백제의 부흥을 위해 백제 유민들이 거창에 거열성, 남원에 거물성(居物城), 구례에 사평성(沙平城), 장수에 덕안성(德安城) 등을 쌓았는데, 이 중 거열성이 신라와 가장 인접해 있었고 규모도 가장 커서 백제가 멸망한 뒤 3년간 이 곳에서 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고도 전한다.

[형태]

현재 문지(門址)·정호지(井戶址) 및 건물지가 남아 있다. 성벽은 자연석 또는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지형에 따라 3~9m의 높이로 쌓아올렸는데, 특히 산세와 능선의 기복을 이용한 요새적인 산성이나 현재는 거의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둘레 약 2,100m, 높이는 8m이며 너비는 하부가 7m, 상부가 4m로 하부구조를 튼튼히 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국시대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와 백제, 가야의 영역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지금 남아 있는 문헌사료로는 수시로 변하는 각국의 영역을 알아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므로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 조사 연구결과를 충분히 검토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 9월 24일에 사적 제55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6.29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탈해왕 10년(66년)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탈해왕 10년(66)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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