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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304
한자
영어음역 seong
영어의미역 castl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정의도

[정의]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의 공동목적으로 석재나 흙 등을 이용하여 축조한 전통건조물.

[개설]

성은 흔히 성곽이라는 말과 혼용되고 있는데 성곽은 내성과 외성을 전부 일컫는 말이며 목책류의 결구로 해로운 동물이나 척을 방어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아군에게 유리한 지리를 얻고 적군을 불리한 조건하에 접근시키려는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다. 그러나 성의 축조는 군사적인 목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행정적인 목적을 위하여도 축조될 수 있기 때문에 군사적이거나 행정적인 공동목적을 가지고 축조되는 것을 말하며 축성 재료가 광물질이지만 일정한 공간을 분할하여 성 안과 성 밖을 구분하는 결과를 예상하고 성의 축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나라 축성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가장 먼저 보이는 역사의 무대가 왕검성인 점을 생각하면 아직 어디에 어떤 규모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성과 우리 민족과의 유구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성은 처음부터 평탄한 들판에 축조한 것이 아니고 물줄기를 낀 독립된 구역이나 높은 구릉지를 택한 예가 많아 이러한 곳이 생활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성곽은 네모지게 만들지 않고 천연의 지형을 최대로 이용하여 성벽이 구불거리도록 축조하였는데 이것은 축성에 공역을 절약하고 적은 힘을 가지고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는 방안을 험한 지형과 부정형의 구불거리는 성벽으로 보완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은 처음부터 오늘날 볼 수 있는 옛 성터의 모습은 아니었다. 축성의 기술적 변화가 내부적 성장과 발전을 의미하며 그 원인은 생존을 위한 부단한 노력과 항쟁 때문이었다. 역대의 성곽은 왕이 있는 최고 권위의 도시에 마련된 것을 도성이라고 하고 지방의 크고 작은 도시에 있는 것을 읍성이라고 하여 정치행정의 중심지에 축조된 것과 산성·진보·행성 등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것, 그리고 창성·목장성·연락성 등의 특수한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성곽을 경우에 따라서 여러 기준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성곽 이해의 편의를 위한 설명의 필요에 따라 다르다. 다만 성벽이 여러 겹일 경우 내성·외성·중성·위성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며 안팎으로는 성·곽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크기에 따라 성·보, 재료에 따라 토축·석축·목책 등으로도 나눈다. 이처럼 여러 구분이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하여 하나하나의 성곽은 모두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동일한 규모와 양식의 성곽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이유는 축조한 사람과 이용한 사람들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곽 자체는 하나하나가 독립적 기능을 가지고 시작되어 발전된 것임을 보여준다.

[진주지역의 성곽]

진주지역에 소재하는 성곽으로 사적 제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을 비롯해서, 방어산성, 보잠산성, 성산성, 전 송대산성 등의 산성류를 들 수 있다.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시대에 우왕이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명하여 석축토록 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조대에 진주성을 정비하고 외성을 쌓았다.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져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로 3,800명의 소수군대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으나, 다음 해의 전투에서는 10여만의 왜군을 당해내지 못해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은 이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배치되었고, 고종대에는 진주관찰부, 건양대에는 경상남도 관찰사의 감영이 배치되고, 1925년까지 경상남도의 도청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 성의 둘레는 1.7㎞로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 창열사, 의기사, 진주성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촉석문, 공북문, 호국사 등이 있다.

한편, 산성의 축조가 보편화되었던 우리나라의 성곽의 전통을 이어받아 진주지역 역시 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산의 모양에 따라 다양한 성곽을 만들되 약점을 보완하는 각종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 산의 봉우리와 능선, 계곡에 적당한 시설을 배치하여 입체적 구성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멀리서 접근하는 적의 동태를 높은 곳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진주지역의 산성은 현재 그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이며 이름만이 전해오는 유적이 대부분이다.

[의의 및 평가]

현재 남아 있는 성과 그 터전은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지배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공동으로 준비한 생명의 보루로서 존재해 왔으므로 성터는 묻히고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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