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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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印刷 |
영어음역 | inswae |
영어의미역 | printing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이수덕 |
[정의]
문자나 그림을 기계적·화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종이나 천, 기타 물체의 표면에 복제하는 일.
[개설]
인쇄란 일반적으로 문자나 그림 등을 여려 방법을 통하여 종이나 천 등의 물체 표면에 복사하는 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쇄란 인쇄물을 만들기 위한 복제 기술 및 그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인쇄물은 시각적 전달매체이므로 의사소통 수단의 하나에 해당하며, 최근에는 감각과 정서의 반응을 야기할 목적으로 하는 장식 수단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일정한 판면(版面)에 잉크를 묻혀서 그 잉크를 다른 종이나 비닐, 목재, 유리 등의 재료에 옮겨 복제하는 것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인쇄의 한 예이다.
[변천]
1)인쇄의 시작 : 목판인쇄(木版印刷)
우리나라의 인쇄는 8세기 초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글자·먹·종이의 제조기술이 도입되어,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고 먹을 칠하여 그 위에 종이를 얹어 밀어내는 방식이었다.
고구려·백제·신라에서는 중국의 불경을 손으로 베껴 들여오다가 점차 이를 목판에 새겨 인쇄하는 방법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중국에서 704년에 한역되어 2년 뒤에 신라로 들여와 이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706~75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보급과 더불어 이와 관련한 대규모 인쇄사업이 진행되었다. 11세기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새겼으며, 12세기에는 초조대장경에서 빠진 불경을 모아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였고, 이들 불경이 13세기 몽골군과의 전쟁으로 소실되자 ‘재조대장경(再彫大藏經)’을 새롭게 제작하게 되었다.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불리는 『재조대장경』은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인쇄는 금속활자인쇄가 발명된 뒤에도 19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목판은 한번 새겨 놓으면 언제나 다시 찍을 수 있으므로 활판인쇄에서 종이거푸집을 떠놓은 것보다 덜 번거로웠던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2)인쇄술의 발전 : 금속활자인쇄(金屬活字印刷)
금속활자는 목판인쇄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활자인쇄는 글자를 모아 판에 심고 종이에 찍어내고, 이후에 다시 책장에서 활자를 뽑아내어 정리하고 다음 장을 준비하여 판을 짜는 식으로 인쇄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금속활자인쇄는 목판인쇄에 비해 재료·장소·인력 등의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제작하려면 활자의 재료가 되는 금속 관련 기술이 발달해야 했다. 고려는 1102년 중국의 송나라에서 ‘북거푸집방법(고주법 鼓鑄法)’을 배워 와 ‘해동통보(海東通寶)’라는 엽전을 주조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따라서 고려의 금속활자인쇄는 1126년 뒤 얼마 안 되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왕릉에서 출토된 복활자가 1921년에 발굴되어 덕수궁 왕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활자의 금속성분을 분석한 결과 해동통보의 것과 같은 점으로 밝혀져 금속활자 제작의 시기를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금속활자인쇄술은 활자를 만드는 방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활자판 짜는 방법과 쇠붙이에 묻는 먹물을 개발하여 정교하게 밀어 내는 방법 등 세 가지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야 비로소 인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시기 추정은 현재에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다만 13세기 초 이전에 금속활자인쇄가 창안되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론이 제기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3)인쇄기술의 향상과 확대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금속활자인쇄술이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억압정치로 인하여 중앙 관서에서 담당하던 인쇄의 업무가 마비되었고, 1392년 ‘서적원(書籍院)’이 설치되고 금속활자인쇄 업무를 관장하는 직책이 마련되기는 하였지만, 조선의 건국과 왕조 교체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금속활자의 제조기술이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조의 기틀이 대체로 안정기에 접어든 태종 시기부터 숭문(崇文)정책의 강력한 촉진을 위하여 ‘주자소’가 설치되었고 활자를 만들어 많은 책을 찍어내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의 『대명률직해』와 『공신녹권』은 나무활자를 이용하여 제작되었으나, 이후 나무활자를 아비자로 하여 해감모래거푸집을 써서 놋쇠를 부어내어 금속활자를 만들게 되었고 1403년에 처음으로 계미자(癸未字)를 사용하여 중국의 고전과 『동국약운(東國略韻)』을 찍어 내면서 다시금 금속활자인쇄의 장을 열게 되었다.
특히 세종은 인쇄 기술의 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여 활자부어내기·판짜기·종이만들기 기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들 기술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종류의 활자를 만들어 책을 다양하게 찍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최고의 절정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4)현대의 인쇄
현대적인 인쇄술은 개화기 무렵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 오늘날 인쇄는 등사판인쇄로부터 고속윤전인쇄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특히 소비문명이 발달하면서 종이뿐만 아니라 금속판은 물론, 셀로판과 같은 투명체에 복제하는 인쇄도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비닐이나 옷감의 프린트무늬, 식기나 가구의 표면 장식 등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인쇄의 방법과 재료, 범위 등이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경상남도 진주지역의 인쇄]
경상남도 진주의 신식인쇄의 역사는 90여년을 헤아리고 있다. 신식인쇄시설이 도입된 기록은 『경남일보』의 창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국내 최초의 지방지인 『경남일보』가 서울에서 인쇄시설을 구입해 이 지역으로 옮겨온 것이 시초가 되었다. 인쇄시설은 본래 『대동일보사』에 의해 계약되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성사되지 못하자 『경남일보』에서 이를 인수한 것이다.
물론 당시 경상남도 진주에 소규모의 인쇄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남일보』를 제외하고는 진주지역의 인쇄소와 관련하여 법인으로 등록된 기록이 없다. 따라서 『경남일보』를 경상남도 진주지역 최초의 인쇄소로 볼 수 있다.
이후 1935년 『영남춘추』와 『중앙공중보』가 창간되면서 ‘진양당 인쇄소’가 등장하였는데, 인쇄소는 규모는 컸으나 시설은 미흡하였다고 한다. 그 후 ‘진주 개문사’가 『영남춘추』의 인쇄를 맡게 되었으며, 당시의 인쇄물에는 인쇄소들의 광고도 함께 실려 있어 그 무렵의 인쇄소 현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인쇄소는 일제의 정책으로 1941년 ‘진주합동인쇄주식회사’로 통합되었다.
1960년 ‘강산문화사’는 인쇄소로 등록하여 서적을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1982년 ‘금호출판사’는 ‘금호인쇄소’를 겸업으로 하여 등록하여 지역문인들의 자비출판을 담당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