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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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第-次晋州城戰鬪 |
영어의미역 | First Jinjuseong Battle; The |
이칭/별칭 | 진주성대첩,진주대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병수 |
[정의]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진주에서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제1차 전투.
[개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에 침입한 이래 조선 전 지역에서는 관군의 유명무실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성까지 함락되었다. 그러나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면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차츰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선과 일본의 전쟁과정에서 특히 진주에서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 또는 진주대첩이라고도 한다.
[배경]
1592년 왜군이 조선에 침입한 이래 조선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은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처지에 있었던 왜군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인 진주를 먼저 점령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경상우도 조선의 주력 군대가 진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가지고 진주를 공격할 계획하였던 것이다.
[경과]
1592년 9월 말 경 왜장 나가오카[長岡忠興]·하세가와[長谷川秀一] 등은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원과 함안을 거쳐, 편대를 2갈래로 나누어 진주를 향해 공격해 오고 있었다. 이 당시 진주에는 진주목사가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의 이광악(李光岳)이 이끄는 군사 100여 명이 고작이었다. 같은 시기 왜군이 진주를 향해 공격해 온다는 소식에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고 있었다.
10월 5일 왜군 선봉대가 진주에 이르자 김성일 등은 진주의 남녀노소 주민들까지 동원하여 이들까지 무장시켰다. 이튿날 나가오카[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3개 부대로 편성, 2개 부대는 동문 밖에서 성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와 동문를 지나 봉명루(鳳鳴樓) 앞에 각각 진을 쳤으며, 나머지 1개 부대는 봉명루 앞의 왜군들끼리 합세하였다.
이후 11일까지 조선군과 왜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조선은 진주성 내의 군사와 주민들이 왜군과 정면으로 대치하였고, 진주성 밖에서는 응원군인 의병과 지원군들이 배후에서 왜군을 교란하였다. 이때 진주성 내의 조선군은 의병장 김시민 등이 동문 북쪽에서 현자포를 발사하면서 적의 심장부를 공격하였고, 판관 성수경(成守慶) 등은 동문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한편, 성 밖에서는 곽재우(郭再祐)가 의병 200명을 이끌고 배후에서 공격하였고, 임시 고성현령 조응도(趙凝道), 복병장 정유경(鄭惟敬) 등도 군사 500명을 이끌고 진현(晉峴) 고개 위에 올라가 배후에서 적을 위협하였다. 또한 합천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 별장 정기룡(鄭起龍) 등이 왜군과 대결하고,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등도 2,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로 와서 적의 배후를 교란하였다.
진주성 내의 관군민들은 힘을 합쳐 협력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활·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 등을 무기로 하여 적의 공격을 줄기차게 막아 내었다. 또한 성내에서 준비한 끓는 물을 적에게 붓거나 적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줄기차게 막아냈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패퇴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1차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서 임진왜란사에 길이 남는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임진왜란 초기에 각종 전투에서 모두 패한 조선 관군의 무기력한 전세를 역전시키는 전과를 올린 전투라는 점에 의의가 크다. 또한 관료도 군사도 아닌 진주 주민들이 전투에 직접 참여한 진주성 내의 많은 희생정신은 후대 진주 주민들에게 긍지와 교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