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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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第-次晋州城戰鬪 |
영어의미역 | Second Jinjuseong Battle; Th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병수 |
[정의]
임진왜란시 진주성을 중심으로 1592년에 싸운 이래 두 번째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
[개설]
1592년 10월에 조선군과 왜군이 제1차로 전투를 벌인 결과 조선군이 왜군을 대패시킨 이래 왜군은 이를 만회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로도 알려진 이 싸움에서 제1차 진주성전투와는 정반대로 조선군은 왜군에 대패하였다.
[배경]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이래 1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과 일본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종주국 구실을 하였던 명나라에 조선은 구원을 요청하였고, 명나라의 구원과 각 지역의 의병군의 참여로 왜군의 침탈지로 변했던 조선 전 지역의 실지를 만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폐해진 왜군과 더 이상 희생을 원치 않았던 명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왜군은 강화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실지를 회복하고 지난 제1차 전투에서 대패한 치욕도 씻겠다는 의지에서 경상남도를 본거지로 삼던 왜군은 대대적인 군사준비를 갖추어 재차 진주성을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당시 명나라는 강화회담을 핑계로 전투 자체를 피하려고 하고 있었다. 더욱이 관군이 정비되었다고는 하나 그 힘은 미약하였고, 대부분 지역에서는 의병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경상남도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 일대를 점령하고, 19일에는 3만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경과]
1593년 조선 관군은 정비되었지만 체제를 정비할 만한 훈련된 군사가 매우 적어 여전히 왜군에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국 각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전세를 만회하고 있었다. 진주성을 향해 총공세를 전개하려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관군과 의병은 물론 진주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관군으로는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이 진주성으로 들어 왔고,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강희열(姜希悅)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때 진주 주민도 7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주성 전체를 지휘하는 장수는 오히려 의병장 김천일이 맡게 되는 임기응변적인 전투체제가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진주성 안의 관군·의병·주민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6월 21일부터 본격적인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조선 관군과 의병, 주민들이 합세하여 대항하는 가운데 6월 27일까지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성 내에서의 관·군·민은 서로의 역할을 나누어 전투에 임하였다. 관은 편대를 나누어 군사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고, 주민들은 전투를 잘 치르도록 성안의 흙 담을 높이는 작업과 돌을 무기로 나르는 작업을 하였으며, 의병장들은 성을 넘으려는 왜군들을 직접 상대하여 무찔렀다.
그러나 왜군은 성벽의 밑바닥을 파서 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성 밑을 파기 시작하였고, 6월 28일 불행히도 큰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황진은 왜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성안의 관·군·민들은 동분서주하며 성을 끝까지 지키려 하였다. 이종인을 비롯한 군사들은 왜군이 성안에 들어오자 백병전을 벌였고, 주민들도 시가전을 펼쳤으나 이튿날에는 결국은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제2차 진주성전투로 인해 왜군도 적지 않게 전사하였으나 조선의 피해도 엄청나게 컸다. 이종인·김준민·이잠(李潛) 등은 성 안에 남아있던 남녀주민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고, 김천일·고종후·최경회 등은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때 의기 논개(論介)도 촉석루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전투에서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는 하였으나 엄청난 군사적 희생과 물질적 손실로 얼마 뒤 곧 철수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