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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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陽湖-南江- |
영어의미역 | Jinyangho Lake and Namgang Dam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현 |
[정의]
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댐과 남강댐에 의해 생긴 인공호수.
[개관]
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근원은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는데 경호강이라 부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덕천강으로 부른다. 이 두 강이 진주 시내 서쪽 광탄(光灘)[너우니]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 제방을 쌓고 사천만으로 방수로를 뚫어 남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자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남강 유역의 상습적인 수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댐을 건설하는 낙동강 개수계획이 착공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1960년대에 비로소 경제개발계획에 치수사업으로 포함되어 1969년 남강다목적댐이 완공되었으며,‘남강댐 숭상공사’로 불리는 새로운 댐 건설이 1989년 착공되어 2001년 준공되었다. 이 사업의 목적은 댐 저수량의 확대를 통하여 서부경상남도 일대의 생활·공업용수와 관개용수 등 용수를 확보하는 데 중점이 있다.
[조선시대 세곡운반 및 교통로로서의 수통골(삼계)]
조선시대의 육지교통은 인력과 우마를 운반수단으로 하는 보도 중심의 육로와 내륙 수로로서 하운을 활용하는 교통체제로 고개 및 도선장이 교통의 주요 결절점이 되었다. 영남의 세곡(稅穀)은 조선 후기 영조대부터 조운(漕運)으로 서울에 운반되기 시작했다. 서부경상남도지역의 세곡은 가산(駕山)의 우조창(右漕倉)에 모아졌다가 배로 서울에 운반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산청·함양·단성·합천 지역의 세곡이 오미·갈골을 통해 덕천강과 경호강의 합류 지점 근처에 있는 지수골 입구를 거쳐 수통골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도선장 지점으로서 중요한 곳인 지수골(신풍리 동쪽 끝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 골을 넘으면 판문동으로 통한다)은 여러 호의 객주집과 마굿간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택리지』에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므로 온 나라의 장사치는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한 곳의 길이 멀면 노자(路資)가 많이 허비되면서 소득은 적다. 이러므로 배에다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 못하다(我國 山多野小 車行不便 一國商買 皆以馬載貨 道遠盤纏之費羸得少 是故莫如船運貨財而爲貨遷交易之利)”하여, 육로보다 수로를 이용하는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남강이 합류하는 지수골―수통골(삼계) 일대는 가산창의 수운을 이용하기 위한 육로―수로의 운송 전환 지점으로 조선 후기부터 활용된 곳이다. 이 교통로는 오미-갈골-딧내-지수골-귀곡-삼계리(삼거리 혹은 수통골이라 부름)-가산창에 이르는 고개와 하천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삼계리는 결국 남강댐에 의한 인공방수로로 개통되어‘수통골’이라는 삼계리의 별명이 물이 넘어 통한다는 현실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댐 제방과 사천만 방수로 논의]
『정조실록』정조 20년 5월 8일조에 보면, 장재곤이란 자가 “진주 너우니(광탄)에 제방을 만들고 방수로를 사천만으로 뚫으면 낙동강 하류 경상도 13개 읍이 홍수의 위험으로 벗어나 좋은 농지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으나, 거짓말로 드러났다는 기사가 있다. 구상은 기발하였으나, 당시의 기술로는 실현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앞선 발상이었던 것이다.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간민(姦民) 장재곤(張載坤)이란 자가 용동궁(龍洞宮)에 고하기를“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곧장 진주로 흘러가 다시 김해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번 장마가 지면 함안·창원·초계·영산·양산·현풍·김해·칠원·의령·창녕·밀양·진주·성주 등 13개 고을의 강에 인접한 토지가 모두 침수되어 한 포기도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강 상류에는 진주의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라는 곳이 있는데, 양쪽 강안이 가파른 절벽이고 지세가 좁고 낮으며 중앙에 우묵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물길을 뚫어 강물의 방향을 돌려 사천의 바다로 흘러가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 쏟아 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다와의 거리가 25리에 불과하고, 뚫고 소통시킬 곳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길을 뚫은 뒤에 지소두 아래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한다면 13개 읍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장차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이에 비변사가 본도에 공문을 하달하여 물으니, 경상도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하기를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사정을 탐색하고 고을 원을 엄하게 경계하여 착실히 살펴보게 한 결과,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건의한 자의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 광탄에 제방을 축조한다 하더라도 낙동강의 하류는 그대로 있고, 지소두의 목에 물길을 뚫는다 하더라도 조곡의 지맥(地脈)이 점점 높아지게 되면, 예전의 포구는 침수지의 가감이 없어 새로이 튼 물길은 유리하게 유도하기 어렵게 됩니다. 더구나 두류산 남쪽에서 발원한 물이 멀리 광탄에까지 흘러오는 과정에 절벽과 산록이 서로 뒤엉키면서 물살이 매우 빨라지니, 지금에 장정들의 힘을 빌려 하류를 막고 우묵하게 들어간 곳으로 선회하는 물살을 유도한다 하더라도 한번 여름의 호우를 당하여 상류의 물이 급하게 불어나게 되면 그 형세가 틀림없이 제방이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이 제방을 쌓기 전보다 더 극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읍의 성지가 강변의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범람하는 사태는 본래 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지소두에서 물길을 뚫을 만하다는 곳에 대하여 말하면, 그곳은 바다에서 30리 거리에 있으며 땅의 형세가 점점 높아져서 물길이 왕왕 막히고 있는데, 실로 13개 고을의 백성으로 그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13개 고을이 혜택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함안 등 9개 고을은 남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혹 그럴 수 있겠다고 하겠으나, 성주 등 네 고을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애당초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장재곤의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 않으며 행동이 거의 허황됩니다.”하니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수본(手本)을 보고서 일의 형세로 유추하건대 지극히 허황하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해궁(該宮)의 사체는 다른 궁방(宮房)과는 특별하다. 해도에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 먼저 결정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이다. 비록 글을 만들어 판하(判下)하였더라도 해도의 장계를 받아본 뒤에 조치하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니 요량했던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근래에 이러한 간교한 일의 폐단에 대하여 얼마나 엄중히 경계했던가. 이른바‘고발하는 자에 대하여는 네 번 고발하면 한 차례 상을 내린다.’는 법을 시행하지 말게 했다면 감히 상언(上言)하거나 정소(呈訴)할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의 습속이 가증스러우나 간사한 백성들을 어찌 다 논하겠는가. 당해 차지(次知) 중사(中使)는 내시부로 하여금 각별히 엄중 조사하게 하고 앞으로 다시 이런 허황된 일에 대한 수본(手本)을 올릴 경우에는 해당 중사에게 등급을 올려 엄중 처치하는 법을 시행하라. 이러한 뜻을 해도에 지시하여 즉시 13개 고을의 수령에게 통지하게 하라.”
[남강의 홍수와 진주 시내 침수]
남강 하류의 잦은 범람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강 치수사업으로서 남강댐 건설이 요구되었다. 대평면 아래에서 경호강과 합류하는 남강은 그 유량이 평시에는 본류인 낙동강 전체의 27%이지만, 홍수시에는 42%에 달하여 남강 유역이 낙동강 하류의 홍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연강수량은 남강 유역이 1,300㎜, 낙동강 본류인 경상북도는 900~1,000㎜로 남강 유량 비중이 높다. 특히 낙동강 하류의 삼랑진에서 물금 구간 19㎞는 폭 500~800m의 협곡으로서 홍수 시 유통이 불량하여 수위가 급속히 상승함으로써 삼랑진 일대와 진주를 포함한 남강 유역의 홍수 피해가 극심하였다. 1910년대 진주지역의 2대 현안은 경남도청을 진주에 머물게 하는 도청 이전 방지와 남강 치수사업의 실시였다고 한다.
[1936년의 남강 홍수 참상]
1940년에 발행된 『진주대관』에 의하면, 근세에 와서 남강 범람에 대한 기록적인 것은 1920년, 1925년, 1933년의 대홍수였으며, 그 중에서도 1936년 8월의 것이 가장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이 해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쏟아진 집중호우와 강한 태풍으로 인하여 27일 밤은 진주읍내 전 시가지가 침수되는 공포의 밤이 되었으며, 또한 미증유의 태풍 피해를 입음으로써 3만5천의 진주읍민은 복구의 희망조차 가지기 어려울 정도의 참화를 입었다. 이때 남강의 수위는 최고 9.5미터에 이르러 장대동 제방이 터지고,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해서 시내는 순식간에 침수되었으며, 5천5백호의 가옥이 침수되어 진주읍내는 죽음의 거리로 변하였다.
27일부터 28일에 걸쳐 진주읍내에서 침수되어 피해가 컸던 지역은 칠암동·본성동·남성동·동성동·장대동 등이었으며, 망경동·강남동만은 겨우 수난을 면했다. 강우와 태풍이 그치자, 8월 28일부터 군·읍·경찰·소방·재향군인회 등 모든 기관이 총동원되어 복구사업에 들어갔다. 이재민에게 밥을 지어주고 수도를 무료로 개방했으며 우물 소독도 실시하였다. 또한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전염병 예방처치와 방역업무도 하였다.
한편, 28일 이른 아침, 시내 나루를 이용해 순시하면서 참상을 목격한 당시 진주군수는 참상을 도에 보고하였고, 보고를 접수한 도에서는 피해상황과 구제대책을 종합, 수립하여 총독부에까지 보고하였다. 총독부 정무총감은 경남지사의 안내로 9월 3일 피해상황을 들러보고, 남강 치수사업과 경전남부선 철도의 연장, 김천~삼천포간 철도 부설 등의 건의를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때부터 남강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남강댐 공사 추진과정]
남강 치수사업을 포함하는 낙동강 개수공사는 1920년대부터 추진되어왔는데, 낙동강 개수공사는 본류 연안 개수계획과 남강 방수로 계획 및 부산운하 건설로 구분 계획되어 있었다. 1933년과 34년의 홍수, 특히 36년 진주시가지가 완전 침수되는 대홍수를 계기로 낙동강 상류인 남강 치수문제의 시급한 해결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진주대관』에는 「남강치수사업 해결」이라는 장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경남 도청 이전 반대와 남강 치수사업 실시는 오랫동안에 걸쳐 진주 사람의 염원이고 특히 남강 치수사업은 1907년을 전후해 연달아 제창되었다. 전자는 1925년 봄 슬픈 종말을 알리며 부산으로 이전됐고, 후자는 1936년에 결정 시행되었다. 1908년경 실지 답사한 결과 남강 절개공사를 계획, 2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진주의 하류 개양동을 기점으로 약 3리 밖에 있는 장양만(長養灣)에 이르는 운하를 개설하여 남강의 인공 관개용 수로를 만들고, 곁으로 경편철도도 부설하는 사업을 계획하여 출원한 바 있다. 또한 남강에 발전소를 세우고 부산-목포 간 전기철도 계획에 대해 총독부에서 실지답사를 함으로써 진주 주민은 곧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꿈꾸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 남강 치수사업과 수력발전사업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1920년 대홍수로 읍내의 80%가 침수되고서야 비로소 진주 남강 치수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1924년 가을 도청 이전이 발표되어 부득이 일시 중지되었으나 1925년 여름 또다시 남강 범람으로 진주읍내가 침수되자 총독부에 남강 치수사업 실시를 진정하게 되었고, 그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주에서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1933년에 이어서 1934년 7월 낙동강 연안 일대에 대홍수가 일어나자 총독부에 임시치수위원회가 설치되고 남강 치수문제가 일반의 주목을 끌기에 이르고, 도내 각지로부터 진정을 위한 상경이 이어졌다. 그때 총독이 치수현장을 직접 시찰했지만 궤도에 오른 듯했던 남강 치수사업은 실시되지 못하고 진주 사람들을 낙담시켰다.
1936년 8월 27일부터 28일에 걸쳐 큰 손해를 입히자 주민들은 남강 치수에 비장한 결의를 보이며 일어섰다. 산하 읍장, 기성동맹회로부터 진정이 이어지자 경상남도 내무부장은 현장을 바라보고 크게 놀라며 전화위복이 올 것이라고 타일렀다. 이 말 한 마디에 주민들은 강력한 자극을 주었고 결의를 다졌다. 드디어 낙동강 본·지류 피해 연안지역의 도회의원들이 일어나 9월 20일 부산호텔에서 수해대책의 협의회를 연 결과 총독부에 진정키로 하고 도 당국의 양해를 얻어 22일 총독부를 방문하여 진정했다.
10월 24일 오후 실무 관계자들이 진주를 방문하자 남강 문제의 앞날에 한 가닥 희망을 걸게 되었다. 25일 이른 아침 상류를 조사하고 평거면 제방 몇 곳의 암반·토질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군수·읍장 등과 함께 답사를 수행하였다. 지도로 실지를 조사하고 나동면 유수리의 굴착된 부분도 검사했다. 또한 사천군 내 계곡을 답사하고 축동면 가산리로 나와 방수구의 검사도 끝내고 개양으로 왔다.
10월 30일 밤 치수위원으로부터 남강 치수사업의 즉시 시행이 치수위원회에서 의결되었다는 전보가 날아들어 진주읍민은 환희와 흥분이 절정에 이르렀다. 11월 3일 치수조사위원회 통과를 축하하고 앞날을 축복하려는 읍민 집회가 열렸다. 총독부 예산은 통과 5개년 계속사업으로서 1937년 3월 25일 총독부 토목국 부산출장소에서 기본조사에 착수, 그해 10월부터 나동면 유수리의 방수로 공사장에서는 굴착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10수년에 걸친 일로 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드디어 해결의 날이 돌아온 것이다.”
[해방 이후 남강댐 추진과정]
남강 다목적댐은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1920년 낙동강 종합개수계획의 일부로서, 남강 방수로사업은 해방 당시 70%의 공정이 진행되었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36년 착공한 이래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공사는 1962년 경제개발5개년사업으로 본격적으로 다시 착공되어 1969년에 준공되었다. 높이 21m의 중력형 콘크리트 댐을 쌓고, 삼계리 쪽으로는 방수로를 개척하여 사천만까지 11㎞의 인공방수로를 개설하였다. 이 공사의 효과는 홍수 시 사천만으로 방수하여 낙동강 계획 수위를 50~70㎝ 낮추는 것이다. 즉 홍수 시 수위를 낮춤으로써 남강 하류의 연안에 제방을 수축하여 좁아진 하도의 범람을 방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댐과 방수로를 건설함으로써 홍수 시에도 진주시가지의 안전이 보장되며 남강 하류의 범람원이 농경지로 추가적으로 확보되는 반면, 대평면을 중심으로 한 경호강 유역은 저수지로 수몰되는 것이다.
[1980년대 숭상공사]
남강댐 건설 후 20여년이 지난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 토지 이용의 증가와 인구의 도시집중화 등에 따라 각종 용수 수요가 증가하였고, 홍수는 빈발하여 기존 댐의 안전면에서도 기능 증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기존 댐은 계획홍수량 10,570㎥/s 유입 시 남강 본류로 2,000 ㎥/s, 사천만으로 5,460㎥/s를 방류하며 저수지내 3,110㎥/s를 저류하도록 계획되어 있으나, 남강 본류 진주시 지역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800㎥/s의 방류를 초과할 수 없으며, 사천만 지역 또한 방류수로 인한 만내의 수위 상승으로 연안 농경지의 침수 피해 발생이 잦아 방류량의 축소가 요구되고 있다. 한편 홍수 조절 용량은 유입 홍수량에 비해 아주 적어 댐의 안전을 위하여 수위를 만수위 이하로 유지하지 않을 수 없어 용수 공급 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기존 댐의 용수 공급 능력은 진주시와 사천시의 생활·공업용수 210천㎥/일로 계획되어 있으나 홍수 조절을 위하여 저수지를 비워놓아야 하는 실정이어서 광역 상수도사업에 의한 신규 용수 수요의 증가로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존 남강댐 하류에 보강 댐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1987~1989년간에 타당성 검토 및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통하여 기존 댐 위에 덧쌓기로 하는 방안도 검토하였다. 그러나 제반 여건상 기존 댐 하류 지점에 새로이 축조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또한 댐 형식에 있어서는 현지의 여건을 고려하여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으로 설계하였다.
댐 건설의 경과
1984. 12.~1985. 7. 남강댐 보완조사 검토(건설부)
1987. 11.~1988. 10. 타당성조사 및 기본설계(건설부)
1988. 12.~1989. 11. 실시설계(본댐, 여수로, 발전소 및 부대시설-건설부)
1989. 9. 16. 기본계획 공고(건설부 공고 제 121호)
1989. 9. 21. 하천예정지 고시(건설부 고시 제 519호)
1989. 11. 30. 본댐, 여수로 및 부대시설공사 착공
1990. 6. 14. 실시계획 고시(건설부 고시 제 338호)
1990. 5.~1991. 9. 제2단계 실시설계(제수문, 하도계량 및 매립지조성-수공)
1992. 6. 11. 수문 및 부대시설 공사 착공
1992. 11. 11. 발전소 및 부대시설 공사 착공
1995. 11. 20. 남강댐 사천만 방수로 보강공사 착공
1996. 11. 7. 발전소 및 부대시설공사 준공
1997. 11. 3. 남강댐 사천만 방수로 보강공사 준공
1998. 12. 15. 제수문 및 부대 시설공사 준공
1999. 12. 20. 본댐, 여수로 및 부대 시설공사 준공
2001. 12. 사업 준공
1970년 완공된 남강댐이 남강유역의 홍수조절에 중점이 있었다면, 1989년 착공된‘남강댐 숭상공사’로 불리는 새로운 댐건설은 생활·공업용수와 관개용수 등 용수 확보에 중점이 있다. 용수가 공급되는 지역 범위가 진주에서 통영·고성·사천 등으로 확대된다. 저수량을 증대(190만 톤에서 309.2만 톤으로)시키기 위하여 댐의 높이도 21m에서 34m로 높이고, 대평면을 비롯하여 침수지역의 1,100가구가 추가로 이주함으로써 경호강은 더 큰 저수지로 변화되었다. 이로써 생활공간으로서 대평면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고 덕천강의 수곡면도 상당 부분 수몰지로 변했다.
[댐 시설]
남강댐 유역은 낙동강의 제1지류에 속해 있으며, 낙동강 유역면적(23,859㎢)의 14.5%에 해당한다. 남강 유역은 유역면적이 3,466㎢이고, 낙동강 합류점으로부터 80㎞ 상류 지점에 남강댐이 위치하고 있다. 남강댐 지점의 유역면적은 2,285㎢이며, 유역 중앙부의 지리산맥을 경계로 댐 좌측으로 덕천강(450㎢)이, 우측으로 남강 본류(1,835㎢)가 형성되어 댐 지점에서 합류한다. 분수령까지의 유로장은 108㎞이고, 유역의 평균 폭은 약 21㎞, 형상계수는 0.19이다.
남강댐의 주요시설물은 높이 34m, 길이 1,126m의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인 본댐과 문비 3문을 갖춘 여수로와 시설용량 14,000Kw의 발전소, 그리고 홍수 시 사천만으로 홍수를 방류하기 위한 높이 31m, 길이 258m 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인 제수문 등으로 구성된다.
본 댐 지점은 진주시 서남 측에 위치한 현 남강댐의 직하류로서 댐 좌측은 진주시 판문동에, 댐 우측은 진주시 내동면 삼계리에 위치한다. 댐의 형식은 댐 지점의 두꺼운 퇴적층에 따른 기초 처리 및 인근의 이용 가능한 축조재료 등을 고려하여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으로 계획하였으며, 특히 기초처리 공법에 있어서는 댐 지점이 연약지반으로 퇴적층이 두껍고 지하수위가 높을 뿐 아니라, 보강댐 좌안부가 기존 댐으로부터 불과 1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현재의 댐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지반을 교란시키지 않고 그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하연속벽(diaphragm wall) 공법을 채택하였다.
남강 보강댐은 기존 댐의 하류에 댐과 여수로 및 발전소를 건설하게 되어 기존 구조물이 가물막이 역할을 하게 되어 홍수 조절이 가능하므로 다른 댐 건설에서처럼 유수 전환이 크게 문제되지 않으나, 공사기간 중에 홍수 방류 및 하류 용수 공급을 위한 발전방류를 해야 하므로 신설 구조물공사에 지장이 없도록 가물막이 설치가 필요하다. 가물막이 형식은 중심 코아형 사력댐으로 하였으며, 기초처리는 Soil Cement Wall 공법으로 시행하였다. 제수문 유수 전환 계획은 홍수 방류 시 지장을 주지 않도록 월류가 허용되는 콘크리트 가물막이 댐을 설치하였다.
여수로는 댐 지점의 지형과 댐 축을 고려하여 댐 제체 및 발전소와 일체로 하여 댐 우안측에 설치토록 계획하였으며, 여수로 좌측은 댐 제체와 접속되며 우측은 발전소와 접속되도록 하였다. 여수로 설계 방류량은 계획홍수위 EL.46.0m에서 800㎥/s가 되도록 설계하였다. 접근 수로는 약 60m로서 댐 제체와 중력식 측벽으로 접속하여 댐 표면차수벽 콘크리트와 연결시켰으며, 본댐에 접속되어 건설되는 오리피스 형식의 웨어부는 기반암에 놓이는 콘크리트구조물로 정부 표고가 EL.29.0m이며, 3개의 공구 형태의 통수단면을 가진다. 웨어부에는 홍수 조절을 위하여 폭 6.4m, 높이 5.4m 의 roller gate가 설치되며, 댐 정부와 여수로 및 댐 우안을 연결하기 위해 교량이 설치되었다. 또 웨어부 하류는 유속에너지를 감세시키기 위하여 Chute Block과 End sill을 장치한 USBR II형의 감세지가 설치되었다.
남강발전소는 시설용량 14,000kw(7,000kw×2기)로서, 댐 우안의 직하류에 위치한다. 발전소의 주요 구조는 취수설비·발전소·방수로 및 우안 접속부 중력식댐으로 이루어지며, 발전 취수구는 기반암에 놓이는 정부표고 EL.28.m의 웨어형 콘크리트구조물로서, Roller gate 2문과 Trash rack 2조가 설치된다. 취수 설비 우측으로는 발전소와 댐 우안을 접속하기 위하여 본 댐 정부표고 EL. 51.0m와 같은 높이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 38.3m가 설치되도록 하였다.
발전소 건물은 반지하식의 5층 철근콘크리트 구조로서 폭 32.8m, 길이35.0m이며, 발전 전력은 케이블 암거를 통하여 66kv 옥외 변전설비에 송전되도록 하였다. 한편 발전설비는 기존 남강댐 발전소의 설비를 최대한 재활용하도록 하였다.
발전 및 변전 설비는 7MVA 용량의 수차-발전기로부터 생산되는 3.45kv 전압을 66kv 전압으로 승압시켜, 진주변전소에 전력을 공급하고, 전력 공급을 위한 옥외변전소에는 GCB(가스차단기)와 주변압기(15MVA) 등이 설치되어 있다.
제수문은 홍수를 직접 바다(사천만)로 방류하기 위해 설치되는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서 보강 제수문은 기존 제수문의 하류 약 700m 지점에 위치한다. 제수문의 계획방류량은 200년 빈도 계획 홍수위 EL. 46.0m에서 계획 방류량 3,250㎥/s이며, PMF 홍수 시 6,000㎥/sec를 방류하는 것으로 설계하였다. 제수문의 구조형식은 사천방수로의 과다한 방류를 방지하는 한편, 이상 홍수시의 방류 능력 제고를 위해 방류거 및 월류언의 복합적인 홍수 배제 형식을 가지는 콘크리트 중력식댐이다. 월류부의 중앙부에 문비 4문이 설치되는 월류언이 위치하여, 그 좌우의 중력식댐 내에 각각 문비 4문씩이 설치되는 방류거가 있는데, 정부표고는 EL. 51.0m이다. 문비는 Roller gate식으로서 방수거부는 EL. 63.0m, 월류언부는 EL.70m에 콘크리트 구조로 된 권양대를 설치하였으며, 방류시의 유속을 감세키 위하여 폭 140m, 길이 50m의 감세지를 설치하였다.
하도 개량 및 매립지 조성은 남강댐 저수지 상류부 남강 본류와 덕천강에 축조되어 있는 현재의 제방 및 토적지역을 굴착하여 하도의 안정을 기하고, 홍수 소통에 지장이 없도록 하도 개량과 굴착토를 이용하여 제방을 축조하고 제내지를 매립하여 농경지를 조성함으로써 수몰 주민의 이주 정착과 영농이 가능토록 하는 사업이다. 총 19,791천㎥를 굴착하여 저수지 하도를 개량하고 8개 지구 4.65k㎥ 규모의 매립지를 조성하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댐 건설의 효과]
남강댐이 보강되면 269.8백만㎥/년의 홍수 조절 능력이 확보되어 설계 방류량이 기존 댐의 7,460㎥/s에서 4,050㎥/s로 감축된다. 이는 기존 댐 방류량의 약 50%를 감축하는 것으로서 댐 하류 진주시 및 사천만 연안의 홍수피해를 크게 경감시킬 것이다.
농업용수는 남강댐~낙동강 본류간의 관개 대상 면적 7,200ha에 대하여 연간 226.8×106㎥을 안정적으로 공급한다. 생활·공업용수 공급은 목표연도를 2021년으로 하며, 공급 대상 지역은 진주시·사천시·통영시·고성군 등으로 연간 224.4×106㎥를 공급한다. 하천 유지 용수 공급량은 연간 122.1×106㎥으로 남강의 수질 개선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남강댐 발전소에서 연간 41.3백kwh의 수력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이 지역의 전력 첨두 수요에 대처함은 물론, 막대한 양의 석유 수입 대체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저수지 상류부 하도에 대한 개량사업을 실시하여 하도의 안정과 원활한 홍수 소통을 기하고, 굴착토를 이용하여 제방 축조 및 대규모 농경지(483ha)를 조성하여 수몰 이주민의 이주정착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댐으로 인하여 형성된 저수지는 호반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국민관광 휴양처의 제공과 함께 주변의 진주시 공원지역 관광개발 촉진에 따른 지역주민의 소득 증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침수지역과 이주민]
남강 보강댐을 건설함으로써 수몰되는 지역은 진주시·사천시·산청군 등 3개 시·군, 8개 면, 28개 리이며, 그 면적은 수몰지 13,399천㎡, 간접보상 1,694천㎡ 및 공사용지 2,002천㎡이다. 댐 건설공사에 따른 수몰 토지 및 지장물건 보상, 주민 이주 대책 및 도로 이설 등의 보상, 부대사업 업무 등에 대하여 수자원공사와 경상남도 간에 위·수탁협약을 체결하여 시행하였고, 국도이설(국도 2, 3호선)은 부산지방 국토관리청에서, 이설철도는 철도청에서 각각 전담하여 시행하였다.
남강댐 공사용지의 취득 및 손실보상은 댐 공사 착수의 원활화 및 보상액 조기지급 등을 고려하여 한국수자원공사 현장사무소에서 직접 보상토록 조치하고, 1989년 12월 16일 가설비부지 및 본 댐 진입도로 등의 우선 보상을 위하여 1990년 2월 기본실태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90년 5월부터 보상을 시작하여 1996년 10월에 완료하였다. 보상 물건은 토지 398천㎡, 건물 118동, 분묘 174기, 기타 지장물건들이다.
1989년 9월 16일 남강댐 보강사업 기본계획이 공고되어 보강사업에 따른 보상구역이 결정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보상업무에 착수하였다. 수몰지역의 용지취득 및 손실보상은 1989년 11월 21일 한국수자원공사와 경상남도 간에 보상업무 위·수탁 협약을 체결하고, 보상업무 수행을 위하여 경상남도 남강댐건설지원사업소를 1990년 7월 9일 개소하여 2001년 12월까지 시행하였다. 수몰지역에 대한 보상은 행정구역별로 동일인 재산 동시보상의 원칙, 현실, 이용 상황에 따른 보상원칙, 적정보상의 원칙, 보상금 적기지급 원칙, 공정보상의 원칙에 따라 수몰주민의 생활 안정 도모 적기 이주를 목표로 연차별 보상계획을 수립, 시행하였다.
남강댐 보강사업으로 생활근거를 상실하게 되는 주민 중 이주정착지에 이주를 희망하는 주민이 10호 이상인 경우, 이주대책을 수립토록 되어 있어 이주대책을 수립코자 경상남도가 집단이주 희망자를 조사한 결과 총 1,525세대(6,434명) 중 568세대가 이주단지 조성을 희망하여, 이에 맞추어 이주대책 계획을 수립, 시행하였다. 자유이주를 원하거나 이주단지를 조성하지 못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세대 당 이주정착지원금 및 생활안정자금(800~1200만원)을 지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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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진양호로 수몰 이후 생활공간 변화]
1969년 남강댐 완성으로 경호강 주변 교통로가 수몰되고 진주~하동 간 국도 역시 나동과 완사 쪽으로 이설되었다. 진양호가 면내 각 지역을 교통적으로 격리시키게 됨에 따라 대평면은 교통로에 의하여 대평·신풍, 그리고 마동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진양호로 수몰된 초기에는 3개 지역으로 운행하는 배가 마동(삼원호), 신풍(대평호), 상촌·대평(진양호) 등 3개 노선으로 운행되었으나, 고개를 넘어 진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가 개설되자 정기버스가 운행하게 되고 정기 선박 교통은 사라졌다. 대평면은 수몰 전 진주시와 가장 인접하여 판문동까지 10여㎞ 정도의 가까운 길이 진양호를 우회하는 25㎞ 이상의 먼 길로 바뀌게 되었다. 대평면 내에서도 신풍은 면소재지 상촌에서 1시간 반 거리로 멀어지는 등 대평면은 단일 생활공간이 아니라 진양호를 가운데 두고 수개의 생활공간으로 분리되었다. 곧 남강댐과 진양호는 대평면을 교통상의 벽지로 돌려놓았다.
중심 서비스 기능에 따라 정주체계 계층을 나눌 경우, 대평면은 1993년 기준으로 자연촌(기초생활권) 17개, 초등학교(1차생활권) 3개(분교 포함), 그리고 1개의 행정서비스권(2차생활권, 면사무소·지서·우체국·농협지소) 등 3계층 생활권으로 형성된다. 제2차 생활권 중심 서비스의 면내 입지 변화는 행정서비스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면사무소가 대평리에서 문을 연 이래, 침곡의 하촌(관동)에서 수몰(1970)로 대평 임시 이전 및 남부출장소 설치(1971년, 하촌·당촌·내촌·신풍), 그리고 출장소를 폐지하고 현재의 침곡 상촌에 있기까지 수차례 이동하였다. 현재 지서·우체국은 마동의 사평에 입지하고, 농협은 대평에 남아 행정서비스 기능은 침곡·마동, 그리고 대평에 분산되어 있다. 구매서비스 기능은 조선시대에 마동장이 있었으나 없어졌다. 1950년대는 대평장(1·6일장, 점포 64개)이 섰으나 다시 진양호 수몰로 인한 인구 감소와 정기노선 버스 감소, 이동수퍼 등 구매 접근성의 증대로 장이 소멸되었다.
학교는 조선시대 내촌에 청계서원이 있었다. 1923년 침곡 하촌에 대평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고, 마동에는 진서중학교가 1953년 설립되었으나 남강댐 건설 이후 수곡면 대천리로 이동하였다. 1922년 하촌 관동에 최초로 건립된 대평초등학교는 해방 직후 마동·신풍·한평 3개교로 분리되었다. 기초생활권은 17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중심서비스 기능을 하는 마을회관과 경로당은 어은·대평·당촌·내촌·신풍 등 5개소에 있다.
남강댐 보강사업으로 수몰되는 지역에 산재해 있는 유물·유적 등 문화재 보존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경상남도와 경상대학교 박물관간에 남강댐 수몰지구 지표조사, 학술조사, 용역계약을 체결하여 1992. 1. 5.~1992. 8. 25.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에 따른 경상남도의 문화유적 보존계획서를 토대로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발굴 및 이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95년부터 1999년까지 29개 지구에서 조사 및 발굴을 수행하여 출토된 유물은 경상대학교 박물관 등 18개 기관에서 보관 관리 중에 있다.
대평면의 경우 대부분의 촌락이 여러 성씨가 함께 사는 곳이며, 전형적 씨족촌락으로는 창원황씨의 신풍마을을 들 수 있다. 수몰 이전의 신풍마을은 마을 앞 강가의 장승이 있는 벅수거리, 마을 중핵부의 창원황씨 입향조를 모신 사당과 재실, 열녀비·효자비, 곳곳에 있는 정자, 마을 뒤의 당산, 산골의 암자, 그리고 마을향약인 동안(洞案) 등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전형적 씨족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평면 전체에서 많이 나타나는 유교적 문화경관은 씨족의 입향조 등 선조를 제사하는 기능을 하는 사(祠), 사의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씨족의 회합장 및 서당 등 복합적 기능을 행하는 재(齋, 흔히 재실이라고 부름)가 대표적이다. 대평면의 대표적 씨족마을인 신풍에는 열녀비와 효자비가 많다. 이들은 남강댐 건설 이후 동산재 옆에 옮겨져 있다. 지역별 주요 유교 문화경관을 살펴보면, 마동(내촌·당촌)의 청계서원(淸溪書院)[1840년 설립]은 지금 훼철되어 없고, 터에 비가 세워져 있다, 반룡재(盤龍齋, 진양강씨)·퇴수정(退水亭, 진양허씨, 신풍에서 이전)·족정(足亭)·허백당(虛白堂) 등 옛날에 있었다 하는 정자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다. 침곡(상촌·중촌·하촌) 지역에는 효산재(孝山齋, 진양정씨)·화양정사(華陽精舍, 진양정씨)·진주 도통사(道統祠), 공자·주자·안자)·송호재(松虎齋, 순흥안씨)·석강재(碩剛齋, 순흥안씨)·한천재(寒泉齋, 순흥안씨)·염수재(念修齋, 순흥안씨)·반숙정(盤淑亭, 순흥안씨) 등이 있었으나 일부는 1970년 수몰로 없어지기도 했다. 대평리에는 은산재(隱山齋)[김녕김씨]·경모재(敬慕齋)[영일정씨]·추모재(追慕齋)[파평윤씨]·옥강재(玉岡齋)[칠원제씨]·고산정(孤山亭) 등이 있다. 신풍마을에는 동산재(東山齋)[창원황씨 재실]·삼고대(三高臺)·용강정(龍岡亭)·퇴수정(退水亭, 진양허씨, 당촌으로 이전)·칠수정(七水亭)이 있었지만, 동산재를 제외하고는 수몰로 없어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