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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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治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이루어지는 정치권력 획득 및 그에 관련된 활동.
[개설]
현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해방 이후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좌우 이념 대립이 극렬하였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에서의 좌파 세력은 거의 사라졌고 보수주의 세력의 권위주의적인 집권 형태가 이어져 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공식적인 첫 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은 권위주의 독재 정권으로서 장기 집권을 시도하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으나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은 군사 독재 정권으로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여 야당과 일반 국민에 대한 억압적 통치를 이어 나갔다.
오랜 기간의 권위주의 독재 정권에서 국회는 민주주의의 대의 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당이 일방적으로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야당이 정권에 대항하려면 역시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나 정당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여론 수렴을 통해 건전한 대의제를 확립하는 일은 뒤로 미루어졌다.
한편, 제도권 바깥에서는 이른바 재야 운동권 세력이 반독재 투쟁을 이어 나갔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이후 지방 자치 제도가 실시되면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점차 민주적인 형태를 확립하여 갔고 현재도 정치 개혁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7년 이후 직선제로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정치의 민주화, 선진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으나 여전히 구시대적 정치 행태의 문제는 산적해 있는 상황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정치 상황도 이러한 중앙 정치가 변화하는 양상에 따라 영향을 받으면서 전개되고 있다.
[변천]
1. 해방 이후~1970년대
인천은 정부 수립 이후 중앙 정치 공간에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독재와 장기 집권을 유지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가운데에서도 무소속과 야당 후보를 비교적 많이 당선시킨 지역이었다. 현재의 미추홀구에 속하는 지역도 당시 이러한 인천의 정치적 특성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인천의 남구가 개설된 것은 1968년 1월 1일로, 이때부터 남구는 독자적인 정치 단위로서 존재하였다.
남구가 개설된 뒤 처음 치러진 국회 의원 선거는 1971년 제8대 선거로, 경기도 제2 선거구였던 남구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의 김은하가 당선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이 인천의 나머지 두 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내어 남구는 인천에서 유일하게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 지역이었다. 김은하는 이미 이전에 인천에서 제6대와 제7대 국회 의원을 지낸 인물로 인천 지역의 중요한 정치 인사였다. 1973년 2월 27일 치러진 제9대 국회 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시행되었다. 당시 선거에서 제1 지역구에 속한 인천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유승원과 신민당의 김은하가 당선되었는데 남구의 투표 결과는 김은하가 유효 투표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여 남구가 김은하의 지역 기반임을 확인하였다. 이어 1978년의 1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의 김은하가 남구에서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2. 제5·6 공화국 시대
1979년 10월 26일 유신 독재로 장기 집권을 이어 가던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뒤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1979년의 12·12 군사 쿠데타와 1980년의 5·17 쿠데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어 치러진 1981년 3월 25일의 제11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인천에서 신군부 세력이 주도해 창설한 민주 정의당[약칭 ‘민정당’]의 맹은재와 민주 한국당[약칭 ‘민한당’]으로 소속을 바꿔 출마한 김은하가 당선되었다. 김은하는 이 선거에서 또 당선되었지만 인천 남구의 득표에서는 맹은재에게 약 7천 표가 뒤졌다. 1985년 12월 12일 열린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인천직할시 남구는 중구와 하나의 선거구로 묶여 있었는데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신한 민주당[약칭 ‘신민당’] 후보가 각각 당선되었고, 민한당 후보로 출마한 김은하는 낙선하였다. 당시 선거에서는 군사 정권에 맞섰던 야당 인사들이 결집한 신민당 돌풍이 일어나, ‘어용 야당’으로 인식되었던 민한당은 몰락하였다. 남구의 선거 결과 역시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전두환 독재 정권에 대한 범국민적 투쟁이 총결집하였던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등을 포함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졌다. 당시 선거에서는 통일 민주당[약칭 ‘통민당’]의 김영삼, 평화 민주당[약칭 ‘평민당’]의 김대중 등 야당 유력 후보들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직선제로 집권한 정권이 재등장하고 소선거구제로 바뀌어 치러진 1988년 4월 26일의 1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인천직할시 남구는 갑과 을의 두 선거구로 나뉘었는데 두 선거구 모두 민정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선거 결과는 여소야대로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민의 견제 심리가 표출되었다.
여소야대의 선거 결과 때문에 수세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은 1990년 여당인 민정당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 공화당[약칭 ‘공화당’]과 통합해 민주 자유당[약칭 ‘민자당’]이라는 거대 집권당을 만들어 냈다. 이후 3당 합당에 반발한 통일민주당 일부 인사와 김대중이 주도하던 야당인 평화민주당 등이 결합하여 통합 민주당[약칭 ‘민주당’]을 만들어냈고, 기업가 정주영의 주도로 통일 국민당[약칭 ‘국민당’]이 창당되었다. 1992년 3월 24일의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인천직할시 남구 갑에서는 민자당 후보가, 남구 을에서는 야당인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3. 문민정부 수립 이후 시대
이어 1992년 12월에는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는데, 여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대통령에 취임한 뒤 여러 가지 정치·사회·경제적 개혁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각종 대형 사건 사고가 연이어 일어나고 집권 세력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정권에 대한 지지가 점차 줄어들자 김영삼은 민자당의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한편, 민주당은 민주당과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해 만든 새 정치 국민 회의[약칭 ‘국민 회의’]로 나뉘었고, 민자당에서 탈당한 김종필은 자유 민주 연합[약칭 ‘자민련’]을 창당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이 참여한 1996년 4월 11일의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인천광역시 남구 갑과 을 선거구에서 모두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이후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와 경제 상황의 파탄으로 말미암아 국민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신한국당이 지지율 만회와 재집권을 위해 민주당과 통합함으로써 한나라당이 출범하였으며 국민 회의의 김대중은 자민련의 김종필과 연합하여 대통령 선거에 임하였다. 1997년 12월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과 연합한 김대중은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는 한국 헌정사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해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사례이다.
1997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지만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되었고 국민회의는 이름을 새천년 민주당[약칭 ‘민주당’]으로 바꾸고 선거에 임했지만 패배하였다. 인천광역시 남구의 갑, 을 선거구에서도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2년 12월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는 민주당의 노무현,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맞붙게 되었다. 또 진보 세력에서는 민주 노동당을 만들어 권영길을 후보로 내세웠다. 이 선거에서 노무현이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노무현을 지지하는 국회 의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민주당을 탈당한 뒤 열린 우리당을 새로 창당하였다. 열린 우리당은 2004년의 제17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의석 과반수를 획득하였다. 인천광역시 남구의 갑, 을 선거구에서도 모두 열린 우리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열린 우리당은 노무현 정부의 정책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고 결국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에 해체되었으며 열린 우리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대통합 민주 신당[약칭 ‘통합 신당’ 또는 ‘신당’]이 창당되었다.
2006년 12월의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결하여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대선 이듬해에 치러진 제18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며 인천광역시 남구 갑, 을 선거구에서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후 2011년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으며, 대통합 민주 신당은 2008년 기존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으로 바뀐 뒤 다시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으며, 이후 시민 세력 등과 연합하여 민주 통합당으로 재탄생하였다.
한편 1995년에는 지방 자치제의 실시에 따라 광역 자치 단체장과 광역 의회 의원, 기초 자치 단체장과 기초 의회 의원을 뽑는 전국 동시 지방 선거가 치러졌다. 1995년 이후의 남구의 구청장 당선자를 살펴보면 1995년의 제1회 선거에서는 민자당 후보가, 1998년의 제2회 선거에서는 국민 회의 후보가, 2002년의 제3회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2006년의 제4회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2010년의 제5회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구 의원의 경우는 2002년의 제3회 지방 선거 때까지 정당 공천이 없었으며 제4회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며, 제5회 선거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기 일곱 석씩을, 그리고 민주 노동당이 한 석을 차지하였다.
[현황]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다. 기초 자치 단체장 선거에서 더불어 민주당의 김정식 후보가 8만 1096표[득표율 51.5%]를 얻어 5만 187표[득표율 31.4%]를 얻은 자유 한국당의 이영훈 후보를 제치고 남구청장[현 미추홀구청장]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