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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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서승갑 |
성격 | 개화사상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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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복정리 |
성별 | 남 |
생년 | 1820년 |
몰년 | 1884년 |
본관 | 진주(晋州) |
대표관직 | 수신사 서기 |
[정의]
조선 후기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 출신의 한학자 및 개화사상가.
[개설]
강위(姜瑋)[1820~1884]는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현재의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출생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중무(仲武)·위옥(葦玉)·요장(堯章), 호는 추금(秋琴)·자기(慈屺)·청추각(聽秋閣)·고환당(古懽堂)이다.
[가계]
아버지는 무과를 거쳐 공주 영장(營將) 등을 역임하였으며, 형과 큰아들 그리고 두 명의 손자까지 무과에 급제한 무반 집안 출신이다.
[활동사항]
강위는 병약한 관계로 11세에 서당에 갔으며, 14세에 향시에 응시하였다. 이후 서울에 올라와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의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공부하였으나, 24세 때 신분상의 제약으로 문신이 될 수 없음을 알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고 있던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하였고, 스승이 사망하자 제주도에 귀양가있던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3년간 지도를 받았다. 당시 민노행과 김정희는 청대의 고증학(考證學)을 받아들여 자기만의 고유한 학문 체계를 수립한 실학자들로 당대의 정주학(程朱學)과는 학문적 인식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강위도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인 김정희가 북청 귀양에서 풀려난 뒤 전국을 방랑하며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배제한 참신한 시를 지어 강위는 김택영, 황현과 함께 구한말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1862년(철종 13) 삼남지방에 민란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친구인 정건조의 요청을 받아들여 2만 9천여 자에 달하는 시무책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을 작성하였다. 이는 전정, 군정, 환곡에 관한 혁신적인 개혁안이었으니, 주위에서 조정에 제출하기를 꺼리자 과감히 불살라버리고 전국을 유람하였다. 강위가 서양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대한 계기적인 사건은 1873년(고종 10)과 이듬해 두 차례 중국을 시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서양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한편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개항론을 주장하였다.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필담(筆談)을 맡았다. 그 뒤 1880년 조정에서 김홍집(金弘集)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할 때 김옥균(金玉均)의 추천에 의하여 서기로 수행하였으며 일본에서 흥아회(興亞會)의 간담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82년 김옥균·서광범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제자인 변수(邊燧)와 함께 이들을 수행하였고, 1883년(고종 20) 박영선(朴永善)과 함께 박문국(博文局)을 세웠으며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1860~1938]를 초청하여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하였다.
[학문과 사상]
강위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김정희라 할 수 있으며 자유분방하고 고증학적인 사고를 받아들여 학문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학문의 태도로 인해 경학과 금석문의 학문적인 한계성을 탈피하여 불교와 음양법 등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서양 학문의 실용주의적 태도에 자극을 받아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태도는 개화사상으로 자리하였다. 당시 현실에 대한 인식도 문벌의 특권과 귀천의 차별을 타파해야만 한다고 설파하여 개혁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저술 및 작품]
강위는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함께 구한말 3대 시인으로 불리며, 특히 비분 강개가 서린 격조 높은 율시(律詩)를 잘 지었다. 이건창(李建昌), 황현의 시풍에 영향을 주었고 저서에 『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 『용학해(庸學解)』, 『손무자주평(孫武子註評)』, 『고환당집』 등이 있다.
[묘소]
강위 묘는 선산이 있던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현재의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안골에 있었는데, 후손이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화장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