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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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城隍大神事跡懸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송화섭 |
[순창의 보물,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淳昌城隍大神事跡懸板)이 대중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2년으로, 옥천 향토 사회 문화 연구소 회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찾아낸 것이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은 원래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의 옥천동 성황당 안에 걸려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말 미신 타파라는 미명 아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이 추진되면서 옥천동 성황당이 헐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의 고 설태수는 옥천동 성황당으로 달려갔다. 설태수는 600여 년 동안 순창의 수호신으로 많은 영화를 누리고 대접받던 조상이 한갓 일본의 만행으로 하루아침에 사당과 제의가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성황당에 모셔져 있던 남신상(男神像)과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설태수가 남신상과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을 수습하는 데 적극 앞장 선 이유는 조상 숭배에 대한 계세 의식(繼世意識) 때문이었다. 순창의 성황신은 고려 말의 충신 설공검(薛公儉)[1224~1302]이었다. 옥천동 성황당 남신상 앞에는 ‘설대왕 신위(薛大王神位)’라는 위판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남신상이 설공검 신상이었던 것인데, 설태수에게는 조상신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성황 남신상이 일제 식민지 앞잡이들에 의해 파괴된다는 것은 비분강개할 일이고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일이었을 것이다. 설태수는 집안의 훌륭한 조상이 600여 년 동안 순창 군민들에게 성황대신으로 받들어져 왔던 전통이 강압적으로 종식되는 것에 분통이 터졌지만, 이 시점에서 자신의 도리는 조상신상과 그의 사적을 안전하게 모시는 일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설태수는 옥천동 성황당에서 옮겨 온 남신상을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연화 마을에 있는 옥천 설씨(玉川薛氏) 문중의 선산에 깊숙이 묻고,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은 동전리에 있던 옥천 설씨 문중의 제각인 평산재(平山齋)에 보관해 둠으로써 후손의 도리를 다하였다.
세월이 흘러 퇴락한 평산재를 개축할 때 옥천 향토 사회 문화 연구소 민속자료 발굴팀의 팀장 조규동(曺圭東)이 행랑채에 보관해 두었던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을 발견하였다. 이에 조규동과 양상화는 설태수의 둘째 아들이었던 설동순과 설용선의 협조를 얻어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을 옥천 향토 사회 문화 연구소로 옮겨 오게 되었다. 하마터면 사라질 수도 있었던 순창 성황 신앙의 역사를 기록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찾게 되는 순간이었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현판의 크기는 가로 180㎝, 세로 54㎝이고, 송판 두 장을 위아래로 붙여서 만들었다. 기문은 음각으로 총 1,676자이며 이두문(吏讀文)으로 작성되어 있어 매우 사실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성황 대신 사적 현판이 이두문으로 기록된 것은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이 유일하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방의 성황신에게 첩문(帖文)을 내린 사실을 기록한 현판으로서도 역시 유일하다. 그리하여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은 1997년 7월 20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1월 13일 국가 지정 중요 민속 문화재 제238호로 승격되었다.
[고려 시대 순창의 성황신 설공검과 옥천 설씨 가문]
성황 신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이다. 통일 신라는 중국 당(唐)나라의 사전(祀典)[제사를 지내는 예법] 체계를 도입하면서 대·중·소사(大中小祀)와 삼산 오악(三山五嶽) 제도를 시행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통일 신라 시대에 지방의 촌주 세력들은 호족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호족들은 정치력과 경제력을 강화하면서 지방의 성주 노릇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방 호족들은 지역 단위로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권세를 높이는 장치를 마련하였고, 치소성(治所城)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성곽을 수호하는 성황 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지방 호족들은 치소성의 성주 노릇을 하였고 향촌권을 장악하면서 지방 통치의 효율적 수단으로 성황 신앙을 활용하였다.
고려 시대에 지방 호족들은 향촌 자치권의 역량이 향상되면서 명망 가문과 문벌지족(門閥之族)으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지방 권세가들은 자신의 가문에서 성황신을 배출하고 성황제를 주도하면서 지역에서 권세를 누렸다. 성황신은 지역 수호신으로 지역을 지킨 장군을 배향하기도 하지만, 향촌권을 장악한 가문에서 영웅적인 인물이나 가문을 빛낸 출중한 인물을 성황신으로 배향하는 풍조가 하나의 전통이었다. 설공검이 순창의 성황신으로 배향된 것도 그러한 사례이다.
설공검은 옥천 설씨 가문의 인물이다. 신라의 이름 높은 유학자였던 설총(薛聰)의 후예들이 고려 말엽에 순창으로 들어왔는데, 1214년(고종 1)에 설자승이 지금의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 처음 입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씨 집안은 순창에 들어온 이후에 자손이 번창하면서 일약 명망 가문으로 성장하여 문벌지족이 되었다. 옥천 설씨가 순창에서 명망 가문이라는 사실은 곳곳의 역사 문화유산과 전설에 깃들어 있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은 옥천 설씨 가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설공검이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순창의 성황 대신으로 추앙되었을까?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의 들머리에는 설공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고려 설공검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신(愼)의 아들이다. 신의 어머니 조씨(趙氏)는 네쌍둥이로 여덟 아들을 낳았다. 세 아들이 과거에 올라서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신이 그중의 하나다. 공검(公儉)은 고종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리(參理)에 이르렀을 때 나이가 많아 물러나기를 비니 중찬(中贊)을 가직(加職)하여 치사케 하였다. 죽은 뒤 문량(文良)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케 하였다. 공검은 청렴하고 정직하여 사물을 대할 적에 공손하였으며 몸가짐이 검소하였다. 조관(朝官) 중에 6품 이상의 관원이 친상(親喪)을 당하면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반드시 소복(素服)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다. 자기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신을 거꾸로 신고 급히 나가 맞이하였다. 언젠가 병이 들어 누워 있을 때 채홍철(蔡洪哲)이 가서 진찰을 하였다. 공검이 베 이불을 덮고 왕골자리를 거처하여 쓸쓸하기가 중이 사는 것과 같았다. 채홍철이 나와서 탄식하기를 “우리 무리가 공을 바라보니, 이른바 땅벌레가 황학(黃鶴)에 비교되는 것과 같다 하였다”라고 하였다.”[사적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설선필(薛宣弼)과 옥천 조씨(玉川趙氏) 사이에서 네쌍둥이로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여덟 명 가운데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옥천 조씨는 국대부인에 봉해졌다. 과거 급제자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설신(薛愼)이다. 이와 관련 있는 전설이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팔왕 마을에 전해 온다. 팔왕 마을에는 골밭이 있는데, 설씨 부인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전설에 따르면, ‘설씨 부인이 젖이 네 개이고 쌍둥이 네 배를 낳아서 그 자식이 잘되어 여덟 명 모두 영달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전설이 『고려사(高麗史)』 열전 설공검전에 조씨 부인이 ‘사유이생팔자삼자등과(四乳而生八子三子登科)’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팔왕리(八旺里)의 지명도 팔원군(八元君)이 태어난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팔왕 마을의 골밭에서는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으며, 또 고려 시대로 추정되는 연봉석이 팔왕 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연봉석은 국내에서 순창군 팔덕면에 2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1기가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팔왕 마을에 위치한다. 이 연봉석은 국내에서 유일한 석각 연화도(蓮花圖)를 조각한 것인데, 이와 비교할 만한 다른 사례가 없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연꽃이 불교의 상징이란 점에서 고려 말에 마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설선필이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팔왕 마을에 처음 입향하면서 조성한 풍수 비보(裨補) 기능의 연봉석이라 할 수 있다. 이 연봉석을 속칭 산동리 남근석[팔왕 마을 연봉석]이라 부르고 있다.
설신의 어머니가 조씨 부인이란 점에서 설신의 고향은 팔왕 마을이다. 팔왕 마을에서 태어난 설신은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으로 올라갔으며, 설신은 산동리 팔왕 마을에서 순창 읍내로 내려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설신이 낳은 아들 가운데 설인검(薛仁儉)과 설공검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그중 설공검이 성황 대왕으로 추봉받은 것이다. 설공검은 고종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리까지 올랐고, 죽은 뒤에는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설공검이 성황신으로 배향된 것은 높은 벼슬보다는 그 인품이 더 주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은 위의 인용문에서도 나오듯이, “공검은 청렴하고 정직하여 사물을 대할 적에 공손하였으며 몸가짐이 검소하였다. 조관 중에 6품 이상의 관원이 친상을 당하면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반드시 소복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으며, 자기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신을 거꾸로 신고 급히 나가 맞이하였다”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존경스러운 인물이었겠는가. 이러한 내용은 『고려사』 열전 설공검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인물 조에도 실려 있어, 고려 말에 설공검이 국가적으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순창 고을 사람들이 우러러 성황 대왕으로 받들게 되었던 것이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의 문화재적 가치]
첫째, 순창 성황 신앙은 1214년(고종 1)부터 1563년(명종 18)까지 국가에서 관리한 국제 관사(國祭官祀)였다. 국제 관사는 국가에서 봉작을 내리고 어인(御印)으로 첩문을 내려 보내는 국가 제사를 말한다. 순창의 성황제는 국가가 관리하는 나라 제사이며, 지방 관리들이 제사를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방 관리는 향리(鄕吏) 집단이다. 실제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는 호장, 부호장, 이방, 호방, 병방 등 지방 관리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관청에서 성황제의 모든 제물과 진행을 주관하였지만, 의례의 주축은 무당과 정재들이었다. 당시 무당들은 제사를 주관하는 종교 직능자들이었고, 정재들은 춤을 추는 예인(藝人)들이었다. 국제 관사는 중앙 조정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관 주도의 제사 체계였지만, 지방의 향리 집단들은 토호 세력들이었기에 향권을 가진 문벌지족들이 거행하는 성황제를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순창 단오제는 문벌지족과 지방 관리가 제의 주체이며, 제사의 연행은 무당과 정재가 담당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서는 1241년(고종 28)부터 1563년까지 국가에서 순창 성황신에게 존호를 내리고 첩문을 보낸 사실을 밝혀 놓았다. 국가에서 순창 성황신에게 존호를 내리고 관리하였던 기간은 322년 동안 유지되었다. 순창 성황신에게 내린 존호는 성황 대왕과 성황 대부인이다. 성황 대왕이 설공검이라면, 성황 대부인은 양씨 부인이었다. 두 신상(神像)의 위판에 ‘설씨 대왕 신위(薛氏大王神位)’와 ‘양씨 대부인 신위(楊[梁]氏大夫人神位)’라는 신위명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순창의 성황신과 성황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81년(충렬왕 7)에 성황 대왕을 내리고 1296년(충렬왕 22)에는 성황 대부인을 내리고 있다. 성황 대부인에게 삼한국 대부인이라는 호까지 더한 것으로 볼 때, 이는 최고의 예우를 하는 존호였다. 설씨는 옥천 설씨를 말하고, 양씨는 남원 양씨(南原楊氏)[능성 양씨(綾城梁氏)로 보는 설도 있다]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성씨는 고려 시대 순창의 대표적인 지방 토호 세력이었고 문벌지족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중앙의 권력보다 향촌 자치권을 가진 지방의 권력이 더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는 이두문이 표기되어 있다. 이두는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기록하는 방식을 말한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한문을 쓰면서 한자의 소리와 뜻을 그대로 적는 방법을 고안하여 사용하였으며, 고려 시대까지 한자를 빌려 쓰는 표기법이 유지되었고, 이는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의 ‘성상위백와호사질단(成上爲白臥乎事叱段)’이나 ‘영시량어위(令是良於爲)’는 이두문에 해당하는 글이다. 조선 시대에 한글이 보급되기 이전까지는 순창에서 이두문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한문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이두문의 사용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순창 고을에서는 통일 신라 시대 이두문의 전통이 유지되었음을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넷째,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 순창의 성황당에 봉안된 신상을 건곤 신상(乾坤神像)이라고 표현해 놓았는데, 건곤 신상은 성황 대왕과 성황 대부인을 소조 목각 신상으로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건(乾)은 하늘, 남자를 상징하고, 곤(坤)은 땅, 여자를 상징하는 명칭이다. 건곤은 부부를 가리킨다. 건곤 신상은 소조 목각상이다. 통나무에 얼굴을 조각하여 골은 흙으로 매끄럽게 조형하는 방식이었다. 성황 대왕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였고, 성황 대부인은 홍삼(紅衫)에 족두리를 해 놓았다고 하였다.
건곤 신상을 봉안하는 관행은 고려 시대 전통의 성황신상 봉안 방식이었다. 1743년(영조 19)에 성황당이 낡아서 새롭게 개수하고 건곤 신상, 즉 “부부의 신상을 공경히 고쳐 아름답게 하니 그 분칠한 얼굴과 모습이 살아 있는 것과 흡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닦고 보게 하였다.” 건곤 신상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성황 대부인 신상은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웠던지, 지금도 순창 고을 사람들은 얼굴이 예쁜 아가씨를 보면 “당각시 닮았네”라고 할 정도이다. 당각시는 성황당의 성황 대부인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당시의 당각시 얼굴상은 중요 민속 문화재 102호로 지정된 순창 남계리 석장승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순창 남계리 석장승은 성황 대왕과 성황 대부인을 표현한 석인상으로 추정된다. 순창 남계리 석장승은 매혹적인 안상을 하고 있다.
다섯째, 단오절의 전통을 간직한 곳이 순창이었다. 단오절은 음력 5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5일간을 말하는데, 순창에서는 단오제를 5일간 거행하였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기록에 “해마다 5월 1일에서 5일까지 향리 다섯 명을 번갈아 정하여 각자 그의 집에 당을 설치하여 대왕이 부인을 거느리게 하고 큰 깃발을 세워 표시하였다. 무당의 무리들이 어지러이 떼 지어 모이고 나열하여 정재를 하면 순행하여 제사를 받드니”라고 하였다. 향리 다섯 명을 정하여 각기 향리의 집에 가설 성황당을 세우게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5일 동안 무녀와 정재는 향리 집을 돌아다니며 축원굿을 해 주었던 것이다.
순창의 단오제는 고려 시대의 전형을 보여 주는 전통 제전이었고, 단오절 5일 동안 어떠한 방식으로 제사를 봉행하였는지가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오늘날 순창 단오제를 복원할 수 있는 근거가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정체성도 없는 축제들이 횡행하는 시기에, 전통 제전을 어떠한 방식으로 복원하여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역 축제를 전승·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 담긴 순창 사람들의 정신]
순창 고을 사람들이 순창의 성황제를 얼마나 정성껏 봉행하고 성황당을 관리하였는지가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 나타난다. 현판에 “세월이 오래되어 국제는 폐지되었으나 이후에도 온 경내에 사람들이 지금도 받들어 삼가 제사를 행하니 물이 흐르듯 저절로 이루어져서 길이 이어짐이 끝이 없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국제 관사는 폐지되었으나 순창 단오제는 물 흐르듯이 끝이 없이 이어졌다고 기술해 놓았다. 순창의 성황제는 고려 시대의 전통이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 성황사(城隍祠)에 봉안하였던 성황신상을 국가에서 음사(陰邪)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철폐를 명하였으나, 1743년에도 더 화려하게 성황당을 복원하고 건곤 신상을 봉안하는 것을 보면, 순창의 전통 제전은 국가의 장악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의 “음사를 물리치고 좌도(左道)의 어지러움을 바르게 한 뒤에 단지 초하루와 보름에만 제사를 거행하되, 제물을 정결하게 준비하고 안전에서 부리는 믿을 만한 아전(衙前)을 보내어 제사 지내는 전일에 재계(齋戒)를 하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행하였다”라는 기록을 살펴보면, 무속식과 유교식이 병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사를 물리치고 좌도를 바르게 하여 삭망 제의를 지내며, 순창의 현감이 아전에게 성황제를 지내도록 하는 내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까지 무당들이 성황제를 주관하였으니, 순창의 성황제는 무속식 제사와 유교식 제사로 이원화된 채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는 순창 고을 사람들이 성황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성황당을 관리하였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경히 생각건대 높으신 신명(神明)은 살아 있을 적에는 진신(縉神)이었고 죽어서는 영령(英靈)이 되었다. 여조(麗朝) 이후 책봉한 예(禮)가 지극히 높고 나라와 관가에서 제사를 지내어 끊이지 않았다. 중고로 내려오면서부터 의식이 중간에 끊어졌으므로 바꾸어 전(奠)을 드리는 일을 처음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세월이 여러 번 바뀌고 사우(祠宇)가 자주 바뀌어 갈수록 좁아지게 되었다. 경신년 전호장 임계욱이 개연히 새로 꾸짖고자 하여 무당의 무리들에게서 재물을 모으고 감독하여 수리하게 하였는데, 사당의 모양과 방향 및 배치가 잘못되었으며 또 좁아져서 신을 경건하게 길이 모실 곳이 못 되었다”고 하여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제사가 중간에 끊어진 적이 있고, 여러 번 사우가 바뀌면서도 사당을 짓고 제사를 봉행하는 일은 물 흐르듯이 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당을 관리하는 일에 감격스러울 정도였다고 하였다.
또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에 “이들이 선대의 업적을 이어 아름다운 일을 실천한 것이 가상하다. 옛 일을 더듬고 지금의 일에 감상(感傷)하는 탄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고 간절하게 하니 이 또한 우리 고을이 이 신당에 정성을 두었다는 것을 알겠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니 어찌 밝게 응험(應驗)하여 자손을 길이 도와주는 도리가 없겠는가!”라고 기록해 두었다. 선대의 업적을 잇는 일이 아름답고 가상한 일이고, 성황당 관리에 정성을 두는 것은 후손을 길이 도와주는 도리라고 생각해 온 이 마음이 바로 순창 사람들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