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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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端午亂場-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송화섭 |
[순창의 단오절맞이]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가장 큰 명절이 단오절이다. 단오은 음력 5월 5일로 양수가 겹치는 날이다. 양수가 겹치니 양기(陽氣)가 두 배로 충전되는 날이다. 그래서 단오절을 단양절(端陽節)이라 하였다. 전통적으로 양수가 겹치는 날에 사람들은 모여서 들로 나가 놀기를 즐겨 하였다. 삼월 삼짓날[음력 3월 3일], 오월 오일날[음력 5월 5일], 칠월 칠석날[음력 7월 7일], 중구일[음력 9월 9일]이 양수 명절이다. 양수 명절에는 양기가 충천하는 날이니 집에 앉아 있기가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집에서 벗어나 산과 들로 나아가 밖에서 하루 종일 놀고 먹고 마시며 놀이를 즐겼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얼마나 놀기를 즐겨 하였으면 고대 국가의 제천 의식 기록에서 “연일 주야 무휴 음주 가무(連日晝夜無休飮酒歌舞)”라고 하였겠는가. 단오절도 그러하였다. 단오절은 음력 5월 1일에서 5월 5일까지를 절기로 삼고 있다. 사람들은 닷새 동안 가무 음주를 즐겼다. 아무리 전통적인 관행이라도 닷새 동안 즐길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전통적인 농업력(農業曆)으로 본다면, 단오절 이전에 모심기가 모두 끝난다. 농촌에서 봄철에 모심기가 끝나면 농부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다. 지금은 이앙기로 파종을 하지만, 영농 기계화 이전에는 사람들이 일일이 손으로 한 포기씩 모심기를 하였다.
모심기는 대단히 힘든 노동이었다. 질퍽거리는 진흙탕 논에서 걸어 다니기도 힘든 일인데,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모심기를 마치고 나면 몸이 녹초가 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모심기를 마치면 잠시 농한기(農閑期)를 맞이한다. 그 농한기가 단오절이다. 사람들은 농한기에 한가롭게 쉬지 않고 모여서 놀고 즐기고 제사를 지냈다. 모심기를 마쳤으니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이제 하늘에 우순풍조(雨順風調)를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단옷날에 마을 단위로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기우제는 단오절 기간에 지내는 풍년 기원제이다. 단오제의 본질이 기우제이다.
성황제, 단오 난장(亂場), 두룽정이 물맞이, 응양정 그네뛰기가 순창의 대표적인 단오절 풍속이었다. 단오절 기간에 옥천동 성황사(城隍祠)에서 성황제를 지내면서 성황신에게 풍년을 기원하였다. 순창의 성황제는 고려 시대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 성황제는 고을의 주민들이 고을 수호신에게 제사를 봉행하는 읍치 성황제를 말한다. 순창에서는 고려 후기부터 성황 대왕과 성황 대부인을 받드는 단오절 성황제를 지내 왔다. 성황제는 무당들이 굿을 주도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굿판에 몰려들어 농사 풍년과 우순풍조도 기원하지만 모심기에 지친 심신을 푸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성황굿 터 옆 장터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자연스럽게 놀이판과 놀음판이 형성되었다. 놀이판에서는 장사 씨름판이 벌어졌고, 놀음판은 투전 놀이였다. 장사 씨름판은 농사짓던 힘센 장사들이 송아지 한 마리를 걸고 힘자랑을 하는 놀이였고, 투전판은 돈을 걸고 돈 따먹기를 하는 놀음판이었다. 단옷날에 사람들이 장터에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씨름판과 투전판이 벌어졌고, 구경꾼들까지 더해지면서 난장이 터지게 된 것이다.
[단오 난장은 가장 전통적인 굿판의 원형]
난장은 시장이 아니라 무질서한 현상을 말한다. 난장은 사람들이 모여들면 어디에서나 터진다. 사람들이 모여 놀이판을 벌이는 곳이면 난장판[orgy]이 된다. 난장판은 시장의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놀이를 즐기는 판을 말한다. 그래서 난장판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난장판은 난(亂)+장(場)이다. 난은 무질서한 현상을 말하고, 장은 공간·터·마당을 가리킨다. 그런데 난장판은 무질서하고 아수라장 같지만 흥미진진한 질서가 유지되는 굿판이고 판굿을 보여 준다. 씨름판도 투전판도 모두가 신명 나는 굿판이고 판굿이다. 난장은 씨름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혹은 놀음판에서 따느냐 잃느냐 하는 게 관건이다. 씨름판도 투전판도 놀음판이다. 놀음판이 무질서하게 보이는 난장판이요, 구경거리가 좋은 신명 나는 굿판이라 할 수 있다. 이곳저곳의 씨름판, 투전판도 모두가 흥미진진한 놀음판인 것이다. 난장의 난은 굿이고 판은 마당이다. 난장은 굿마당이라 할 수 있는데, 굿이 무당굿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놀이를 즐기는 현상이 굿인 것이다.
순창의 단오 난장은 난장의 전형을 보여 주는 원형적인 판굿이었고, 마을 굿같은 신명 나는 굿판이었다. 단오 난장은 집단적인 엑스터시가 피어나는 장터 굿이었을 것이다. 순창에서 단오 난장은 장시(場市) 옆 마당에서 벌어졌다. 전통 향촌 사회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시장이었다. 시장의 상인들은 난장의 판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시장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놀이를 즐기기에 좋은 환경이었고, 시장 상인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물품 거래가 활발하면 장사 수익이 좋기에 단옷날에 장터에서 난장을 튼 것이다. 순창에서는 시장 상인들이 송아지 한 마리와 포목점에서 마포(麻布)를 상품으로 내걸고 씨름판을 벌였다. 순창장 상인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하기 좋았고, 농민들은 농한기에 구경거리가 생겨 놀이를 즐기기에 좋았던 것이다.
씨름판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투전판도 생겨났다. 예전에 난장이 설 때에는 머슴들은 집주인에게 용돈을 받았다. 모심기하느라 고생하였다며 단오 난장을 즐기라고 동전 몇 닢씩 주었다. 그 용돈을 받아서 투전판에 기어들어 돈 따먹기를 즐겼다. 투전판은 시장에서 돈을 돌게 만들어 시장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래서 단오 난장이 터지면 상인들은 이득을 챙겨서 좋았고, 농민들은 모여서 놀고 먹고 마시고 즐겨서 좋았다. 단오 난장은 가장 전통적인 한국 축제의 원형이었다.
[순창 단오 난장의 씨름판과 투전판]
순창의 단오 난장 터는 순창 시장 입구, 지금의 시내버스 종점 부근이었다. 단오 난장 부근에는 포목전과 싸전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단오일이 다가오면 단오 제전 위원들이 단오제에서 쓸 비용을 마련하는 걸립을 하였다. 추진 위원들이 사전에 시장 상인들에게 서면으로 단오제를 한다는 문서를 돌리고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며, 농악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걸립(乞粒)[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원을 해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는 일]을 하였다.
특히 시장 사람들이 성금을 많이 냈다. 추진 위원들과 농악대가 점포에 들어서면 상인은 쌀을 말에 가득하게 담아 내놓고 말쌀 위에 촛불을 켜 놓는다. 그러면 농악대는 사업 번창하고 장사가 잘되라고 축원해 주는 굿을 쳐 주었다. 축원이 끝나면 추진 위원들이 그 쌀을 거둬서 가져갔다. 돈을 내는 집도 있었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은 쌀을 내놓았다. 거둬들이는 기준은 별도로 정하지 않고 십시일반으로 곡물을 성금으로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목전과 싸전, 잡화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내놓았다. 포목전 상인들은 씨름판을 조성하기 위하여 장년들의 씨름판에 송아지 한 마리를 상품으로 내걸었고, 청년 씨름판에는 마포를 상품으로 내걸었다. 기성복이 없던 시절에 마포는 옷을 만들어 입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생활 품목이었다.
난장은 음력 5월 초하루부터 5일까지 닷새간 열렸다. 그래서 단오 난장이라고 불렀다. 단오 난장의 가장 큰 구경거리는 씨름판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씨름을 체급별로 한 게 아니라 상씨름이라고 해서 제일 덩치가 좋고 힘이 센 장사가 모래판에 딱 버티고 서서 도전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이었다. 모래판의 제왕을 가리는데, 최종 모래판에 버티고 서 있는 자에게 덤벼들 자가 없으면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향토 사학자 양상화는 1960년대에 순창에서 인계면 최 장사라는 사람이 상씨름꾼으로 소문났었다고 말한다.
씨름판은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부는 아기씨름이라 하여 어린아이들이 씨름하는 방식이다. 2부는 청년들이 참가하여 힘자랑하는 방식인데, 지역별 면 대항식으로 씨름판을 벌였다. 아기씨름과 청년 씨름은 상품으로 포목을 주었다. 단오 난장 마지막 날에 3부 상씨름판이 벌어진다. 상씨름판은 힘깨나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하여 승부를 겨룰 수 있다. 모래판에 먼저 선 사람에게 힘센 장사가 달려드는 방식으로, 최후까지 모래판을 지켜 서 있는 자가 우승한다. 상씨름 우승자에게는 송아지 한 마리를 상품으로 주었는데, 우승을 하면 술 한턱내라고 졸라 대는 사람들이 많으니 송아지를 번쩍 들어 둘러메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순창 단오 난장에서 씨름판이 가장 컸고, 그 다음이 투전판이었다. 투전판은 화투판도 벌어지고, 마작 놀이로 돈내기하는 사람, 주사위로 숫자를 맞춰 돈 걸기 하는 사람, 둥근 판이 돌아갈 때 송곳으로 찍어 돈내기하는 사람 등 다양하였다. 씨름판은 한군데에서 진행되었지만, 투전판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이곳저곳에서 판을 벌였다. 투전판은 농민들이나 머슴들이 쌈짓돈을 털어서 하는 것이기에 판돈이 크지는 않았다. 투전판도 씨름판과 마찬가지로 놀이로서 흥미진진하였다. 사람들은 돈을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였다.
투전판 사이로는 먹거리 장사들도 돌아다녔다. 단오 난장 때에는 시장 옆이라서 간이 술집도 많았고 음식점도 성업을 이루었다. 순창장에서는 지금도 순댓국밥집이 성업 중이다. 순댓국밥집 가운데는 2대째 하는 집도 있고 50여년을 넘게 해 온 집도 있다. 이러한 국밥집들은 1960년대까지 전승된 단오 난장 때에도 국밥집을 하였었다고 보아야 한다. 단오 난장은 단오절 5일 동안 날마다 사람들이 붐볐고,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노는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사람들이 붐빌수록 순창장의 상인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순창에는 “단오 무렵에 장사해서 1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단오절 단오 난장이 성업하였고 상인들에게는 대목이었다. 5일장이 서는 것보다 단오 난장이 더 경제적 효과가 컸다는 이야기이다.
[순창 단오 난장은 지역 경제 활성화의 원동력]
순창 단오 난장에는 순창 사람들만 몰려드는 게 아니었다. 순창은 호남의 중앙이었다. 그리하여 순창을 중심으로 이웃 지역인 임실, 남원 정읍, 곡성, 담양, 옥과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 전라남도 나주에서 순창 단오 난장에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라남도·전라북도를 합쳐 놓고 보면 순창이 중앙에 위치하여 교통이 좋았고, 순창장이 가장 컸기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순창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소전이었다. 소전은 우시장(牛市場)이다. 순창장에 모여든 소가 서울에 올라가는 숫자의 삼분지 일이 된다고 할 정도로 순창의 소전은 컸다. 순창장의 소전은 저녁에 다 파하면 서울까지 소를 끌고 갈 사람을 정하였다. 장정은 소를 네 마리씩 끌고 갔으며, 전주까지 가서 전주 사람들에게 넘겼다고 한다.
소전 다음으로 순창에서 유명한 것이 포목전, 싸전 순이었다. 그래서 단오 난장 때에 소전 상인들이 송아지 한 마리를 상품으로 내놓고, 포목전 사람들이 마포를 상품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소전과 포목전 사람들이 큰손 노릇을 하고, 단오 난장을 트는 데 1등 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큰 상품으로 송아지와 마포를 내놓으면 농악대들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걸립을 하였고, 그 돈으로 단오 난장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어찌 보면 순창 단오 난장은 단오 제전 위원들이 주도하였지만 순창장의 상인들이 장사 수익을 올리는 방편으로 활용하였고, 지역 주민들은 단오절 농한기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제공받아서 좋았을 것이다.
단오 난장은 순창장을 활성화시키는 지름길이다. 지금처럼 지역 축제를 관청에서 예산을 집행하는 방식이 아닌 순수한 민간 주도의 전통 축제가 단오 난장이라 할 수 있다. 순창에서 단오 난장을 복원하여 순창장을 활성화시켜 지역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