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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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川趙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옥천 조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운림리 |내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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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조장(趙璋) |
입향시조 | 조영(趙瑛) |
[정의]
조장을 시조로 하고 조영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옥천 조씨(玉川趙氏)는 조장(趙璋)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옥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옥천 조씨 입향조는 조원길(趙元吉)의 큰아들 조영(趙瑛)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만 5346가구, 4만 9847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옥천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 시조 조장은 고려에서 광록대부 검교 대장군 문하시중(光祿大夫檢校大將軍門下侍中)을 지냈다. 원래 이름은 조준(趙俊) 또는 조준장(趙俊璋)이다. 『순창 군지』에 조장과 아들 판서 조홍규(趙弘圭)와 손자 옥천군(玉川君) 조전(趙佺)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이들 삼대가 순창에 살았고, 그들의 후손들이 세거해 오면서 처음에는 본관을 순창으로 써 오다 1861년(철종 1) 간행된 『신유보(辛酉譜)』에서부터 본관을 옥천으로 바꿨는데,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는 대부분 본관을 옥천으로 하고 있으나 극소수는 순창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순창 군지』에 “고려 중엽 조장이 음사로 검교 대장군에 임명됨[高麗中葉趙璋以蔭仕官檢校大將軍]”이라고 되어 있어 조장의 득관(得貫)을 뒷받침하고 있다.
조장의 증손자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이 고려 후기인 1389년(창왕 2)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설장수(偰長壽),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킨 공으로 대광보국 광록대부(大匡輔國匡祿大夫)로 검교 문하시중 겸 전공 판서로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조원길은 고려가 망하자 순창에 들어가 다시 벼슬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켜 목은(牧隱) 이색(李穡),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과 함께 5은(隱)으로 불렸다. 조원길의 아들 조영과 조유(趙瑜) 역시 고려가 망하자 순창에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태종(太宗)으로부터 부자 삼현(父子三賢)이란 칭송을 들었다. 부자 삼현이란 조영, 조유 그리고 아버지 조원길을 말한다.
[입향 경위]
조원길의 큰아들 조영이 적성면 내월리 내적 마을에 은거하여 들어와 정착한 이후 그 후손이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조원길의 둘째 아들 조유는 전라남도 순천으로 이거하였는데, 이때부터 순천 주암을 중심으로 조유의 자손이 번성하여 전라남도 일대의 거족으로 자리를 굳힌다. 조영의 후손인 모충재(慕忠齋) 조여관(趙汝寬)은 적성면 운림리 임동 마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옥천 조씨는 212가구, 5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의 옥천 조씨는 적성면 운림리 임동 마을과 내월리 내적 마을에 15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였으나, 2013년 현재 운림리 임동 마을에 10가구, 내월리 내적 마을에 12가구가 세거하며 대부분 조영의 후손들이다.
[관련 유적]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산86-14번지에 자리한 옥천 부원군 조원길 묘 및 묘표가 2005년 12월 16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되어 관리받고 있다. 묘는 조원길과 옥천 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봉토분으로 묘역의 형태와 배치가 고려 시대 능묘와 매우 유사하다. 묘비는 1391년 조원길 예장 당시 아들 조유가 세운 것으로, 길이 2m, 폭 50㎝, 두께 30㎝ 정도이다. 묘표 윗부분에만 문자가 새겨져 있어 비대석이나 가첨석 없이 비신석만 땅 속에 절반쯤 묻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 탁본을 통해 42자의 글씨를 밝혀냈다고 한다. 비문 내용은 “1391년(홍무 24) 신미 신축 삭 삼십 일 임오에 전공 판서 조원길과 옥천 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묘이며, 효자[부모의 제사 때 자식을 가리키는 말] 전 부정 조유 찬서자”로 되어 있다. 고려 시대 묘역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