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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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馹孫 |
이칭/별칭 | 계운(季雲),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문민(文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훈 |
출생 시기/일시 | 1464년 - 김일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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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86년 7월 - 김일손 생원·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86년 11월 - 김일손 문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498년 - 김일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06년 - 김일손 복관 |
사당|배향지 | 옥산사 -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 |
사당|배향지 | 자계 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길 62-2[서원리 85] |
사당|배향지 | 도동 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김해(金海) |
대표 관직 | 이조 정랑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 옥산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의 문관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증조할아버지는 김서(金湑),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 아버지는 김맹(金孟)이다. 처는 우극관(禹克寬)의 딸, 후처는 김미손(金尾孫)의 딸이다. 증손은 의병장 김치세(金致世)이다.
[활동 사항]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1464년(세조 10) 출생하여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 해 11월에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에서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 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을 닦는 데 몰두하였다. 다시 승정원 주서(注書), 홍문관 박사, 홍문관 부수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을 지냈으며,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 좌랑, 이조 좌랑 등을 지냈고 관직 생활 동안 여러 차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주로 언관(言官)으로 재직하면서 문종의 왕비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고,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으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다.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506년 중종반정으로 벼슬을 다시 돌려받았고 중종 때 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 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증손인 의병장 김치세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라북도 장수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남도 합천에서 크게 승리하여, 순창군에서는 김일손과 의병장 김치세·김산경 부자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957년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에 옥산사를 만들고 제향하였다. 또한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의 자계 서원(紫溪書院)과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있는 도동 서원(道東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