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92 |
---|---|
한자 | 楊汝樟 |
이칭/별칭 | 거경(巨卿),청향당(淸香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형성 |
출생 시기/일시 | 1610년 - 양여장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656년 - 양여장 사망 |
출생지 | 양여장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
성격 | 창의사|절사 |
성별 | 남 |
본관 | 남원 |
[정의]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창의한 순창 출신의 절사.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거경(巨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할아버지는 영광 군수를 지낸 어은(漁隱) 양사형(楊士衡)[1547~1599]이고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양시매(楊時邁)이다.
[활동 사항]
양여장(楊汝樟)[1610~1656]은 1610년(광해군 2) 순창군 적성면의 귀남(龜南)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총명하여 경사(經史)를 두루 익히며 올바른 행실을 가졌다. 25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촌 형 양여매(楊汝梅)와 함께 창의(倡義)하고자 하였다. 가동(家僮)을 인솔하고 가산을 털어 전마(戰馬) 300필을 사고, 의곡(義穀)을 모았으나 양여매는 어버이가 병이 들어 동반하지 못하였다. 양여장은 홀로 가동들을 인솔하고 전마를 거느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충청도 공주에 이르러 화의(和議) 소식을 들었다. 양여장은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고 거느리고 가던 전마와 군량을 조정에 바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인조는 양여장의 의용을 가상히 여겨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향리에 청향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1656년(효종 7)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