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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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路頭- |
이칭/별칭 | 노지 놓기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집필자 | 황금희 |
[정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액막이로 노두를 놓던 풍습.
[개설]
노두 놓기는 마을 개울에 노두[일종의 징검다리]를 놓아서 마을 사람들이 개울을 쉽게 건너다니도록 하는 세시 풍속이다. 이렇게 하면 개울을 건너는 주민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 되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노두 놓기는 순창 지역에서 ‘노지 놓기’라고 부르며, 한 해 신수가 좋지 않은 가족 구성원의 액땜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하는 풍습이다.
[연원 및 변천]
노두 놓기는 적선의 일종으로 제웅을 만들어서 버리는 풍속에서 비롯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남녀의 나이가 나후직성(羅睺直星)을 당하면 짚으로 인형인 추영(芻靈)을 만드는데 사투리로 이를 처용이라 한다. 머릿속에 동전을 넣고 보름 전날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을 없애버린다. …… 처용의 명칭은 신라 헌강왕 때 동해 용왕 아들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 “열나흗날 밤에 풀로 허수아비[인형]를 만들어 처용(處容)이라 하고 그 머릿속에 동전을 넣었다. …… 처용직성(處容直星)을 가장 꺼려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길에 버려 재액을 막는다.” 이러한 풍속은 오늘날도 전승되었는데, 불교적 적선 의식이 작용하여 남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함으로써 액을 때우고 그것을 상쇄하려는 풍속으로 고정되었다.
예전에는 상수도 시설이 없어 아낙네들은 마을의 냇가나 노지 위에서 빨래를 했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에는 돌이나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운 것을 사람의 힘으로 옮겨야 했으므로 노두를 놓는 일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돌다리를 놓거나 돌 대신 가마니에 돌과 흙을 넣은 오쟁이 같은 것을 놓음으로써 남을 위하여 적선(積善)하는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처럼 선행을 쌓으면 반드시 집안에 경사가 찾아온다는 뜻이다. 노두 놓기는 정초에 행해 오던 세시 액막이 의례였으나, 마을 근처 하천에 시멘트 다리가 건설된 이후로 사라진 풍속이 되었다.
[절차]
노두는 볏섬처럼 짚으로 오쟁이 주머니를 만든 후, 그 안에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든다. 이 노두를 정월 열나흗날에 마을 인근 개울에 사람이 건너가기 좋은 간격으로 놓는다. 보통 3~7개의 홀수로 놓는다. 아들을 못 낳은 사람이나 귀한 아들을 낳은 사람은 노지 돌 밑 혹은 노지 오쟁이 속에 돈을 넣어 두기도 한다. 재수가 있고 명이 길어지라는 의미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정초 액막이는 대체로 정월 열나흗날 이전에 대부분 행해진다. 보통 아들 없는 가정 또는 귀한 자식을 기르는 가정, 그리고 신수가 나쁜 사람들이 노두를 놓는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사람이 노두를 놓으면 아기를 낳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가마니 속에 돈을 넣어 적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새로 놓인 다리를 정월 대보름날 제일 먼저 건너가면 그 해 복이 들어온다고 여겼다.
노두 놓기와 같은 적선은 결국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므로 이러한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신이 액운을 미리 막아 주고 복을 내린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습속이다. 이는 교육적 필요성과 함께 소박한 민간 신앙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졌다. 아울러 노두 놓기 풍속의 형성 과정에는 유교나 불교의 적선 의식도 다분히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