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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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孝孫 |
이칭/별칭 | 유경(有慶),추계(楸溪),문효(文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영성 |
[정의]
조선 전기 순창 군수를 지낸 문관.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유경(有慶), 호는 추계(楸溪). 할아버지는 윤희(尹希)이고, 아버지는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를 지낸 윤처관(尹處寬)이다. 어머니는 감찰 정존(鄭存)의 딸이다. 처는 영의정을 지낸 박원형(朴元亨)의 딸 죽산 박씨(竹山朴氏)이다. 슬하에 윤계형(尹繼衡)·윤승형(尹承衡)·윤복형(尹復衡)·윤세형(尹世衡)·윤함형(尹函衡)·윤지형(尹止衡)·윤완형(尹完衡)의 7형제를 두었다.
[활동 사항]
윤효손(尹孝孫)[1431~1503]은 1450년(세종 32) 생원시에 급제한 뒤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등용되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우헌납, 예조 정랑, 사예, 검상, 사인 등을 지낸 뒤 부모 봉양을 위하여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자청하여 나갔다. 1468년 군자미(軍資米)와 별창(別倉)의 환곡(還穀)만으로는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데 미흡하다고 하여 의창(義倉)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1472년(성종 3)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경국대전(經國大典)』·『오례의주(五禮儀註)』를 수찬하였으며,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뒤 호조 참의를 거쳐 전주 부윤, 형조 참판, 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냈다. 1482년(성종 13) 12월에는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순창 군수가 되었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윤효손은 일찍이 관찰사(觀察使)와 부윤(府尹)이 되었었는데, 이제 낮추어서 군수(郡守)로 제수하였으니, 만약 어버이를 위한다고 하면 하필 낮추어서 군수가 된 뒤에야 그 어버이를 받드는 것입니까? 벼슬의 높고 낮은 등급이 이로부터 문란하여질까 두렵습니다.”라며 문제 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성종 실록』에는 “윤효손이 일찍이 어머니를 위해 고을 수령이 되기를 원하여, 봉양함이 매우 지극해서 비록 손님을 대하고 혹은 일을 다스리는 때를 당했더라도 밥먹을 때가 되면 반드시 아문(衙門)에 돌아와서 아내와 더불어 몸소 음식을 보살피기를 끝까지 변함이 없었으니, 대개 그 효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라는 사신(史臣)의 논평이 실려있다.
1490년 동지중추부사 재직 당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활민 대략(活民大略)』·『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자치통감 강목(資治通鑑綱目)』 등의 서책을 가지고 왔다. 그 뒤 황해도 관찰사, 경상도 양전순찰사(量田巡察使), 형조 판서, 도총부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494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수사관(修史官)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1499년 1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서용되고 이어서 우참찬을 거쳐 150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1501년 좌참찬을 거쳐 숭정대부에 이르렀다가 1503년(연산군 9)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윤효손은 효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후손 윤낙현(尹洛鉉)에 의해 그의 유문(遺文)을 모은 『추계 선생 실기(楸溪先生實記)』가 편찬되었다.
[묘소]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방산 서원(方山書院) 뒤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에 있는 방산 서원[1787년 사액]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