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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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영어의미역 | Tumulu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정상수 |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에 분포한 선사시대에서 고대에 이르는 무덤.
[조사 경위]
울릉도에 있는 유적에 대한 근대적인 조사는 1917년 일본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영남 지역 조사의 일환으로 울릉도를 다녀간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등의 일본인에 의한 조사가 있었으나 그 내용은 미미하였다. 해방 후 1947년과 1957년에 김원룡(金元龍) 등이 체계적으로 조사하였고, 1963년에는 김정기(金正基)가 보충하여 조사하였다. 그 결과는 『울릉도』라는 조사 보고서로 출간되었다. 이때부터 울릉도에 있는 고분에 대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울릉도의 고분은 1963년의 보고에서 최소 87기가 확인되었다.
1997년 서울대학교의 조사와 1998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의 조사에서 최소 54기 정도가 조사되었다. 새로운 몇 개의 고분이 추가되기도 했으나 기존에 알려진 고분들의 파괴가 심하게 진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울릉도의 고분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기단식 적석석실분을 포함된다. 특히, 기단식 적석석실분은 구조가 특수하여 울릉도식 고분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인돌]
고인돌은 울릉읍 저동리·북면 현포리·서면 남서리 등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 고인돌의 형식은 모두 기반식으로 보고되었다. 개석은 두꺼운 화강암을 사용한 것이 공통적인 사항이다. 특히, 현포리와 남서리 고인돌의 개석에서는 성혈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현포리 고인돌 주변의 유물산포지에서 무문 토기와 홍도편이 발견되었다. 이 무문 토기의 기원은 본토의 철기시대 전기 말경, 늦어도 서력 기원 전후의 전형적인 무문 토기로 추정된다. 울릉도에는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포리 일대는 무문 토기인들의 중요한 근거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기단식 적석석실분]
기단식 적석석실분은 사동리·저동리·나리·천부리·현포동·남서동·남양리·태하리 등 8개 행정 구역에 분포되어 있다. 고분은 나리와 남서동 등 몇몇 고분군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안가의 저지대성 구릉지와 산록 완사면에 위치한다. 특히, 남서동 고분군은 입지와 경관이 뛰어나고 석재를 구하기 쉬운 내륙의 산록 경사면과 완사면에 축조되어 있다. 고분의 주변에는 하천·농경지·평지가 있어서 자연 자원을 이용하기에 용이하다.
고분의 구조는 기단부·매장부·봉석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울릉도 지형의 특징인 급경사면에 고분을 만들기 위해 해안가 쪽의 낮은 곳은 석축하고, 그 반대편인 산쪽은 지면을 굴착한 후 묘의 바닥을 마련하였다. 매장부는 지상에 배 모양[舟形]의 긴 석실을 축조하며 천정 뒷부분을 낮추는 경향이 특징적이다. 벽체는 장벽을 주로 할석으로 평적하여 내경되게 쌓았다. 입구에서 중앙부까지는 점차 높게 쌓다가 중간부터 석실 끝부분까지는 점차 낮게 쌓았다. 이에 개석을 덮은 천정의 모습이 장축 방향으로 호선(弧線)을 그리게 되었다. 석실의 평면형은 세장형(細長型)이 대부분이다. 석실은 연도가 확실한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횡구식(橫口式)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봉석부는 다양한 크기의 할석으로 쌓은 적석총의 형태이다. 형태는 부정형이 많고, 특히 봉분 단면은 반원상이 아니라 주로 정상부가 평탄면을 이루며, 개석부가 돌출되어 있는 것도 있다. 따라서 봉분의 형태는 절두원추형(截頭圓錐形)을 이루고 있다.
유물은 고분들이 대부분 도굴되어 고분 내부에서 출토된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고분의 주변에서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회청색의 신라 토기편들이 채집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인화문이 새겨진 토기편 등이 주로 보이며, 기종도 다양하여 고배·완·합·병·호·시루·등잔류 등이 많이 수습되었다.
이 고분의 축조 집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1963년 보고서에서 김원룡(金元龍)은 “낙동강 동안의 삼국시대 석곽묘와 주체 구조에서 유사하며, 신라 중심지의 묘제가 아닌 가야 지방의 묘제와 연결된다. 이 사실은 우산국이나 주민의 출자가 신라계가 아니라 가야계라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박물관 보고자들은 “신라 묘제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울릉도의 실정에 맞게 변형된 것으로 6세기 중엽 이후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울릉도식 고분이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축조되어, 그 양상으로 보아 울릉도에 진출한 신라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산국의 토착 지배층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토착적인 발전을 거쳤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1998년 영남대학교의 조사에서는 “현재의 고고학적 자료의 한계로 고분 축조 집단이 토착민인지 이주민인지 단언하기가 어렵다. 다만, 고분의 구조나 형식이 육지와 어떤 식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착민들이 외부의 영향으로 발전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육지에서 울릉도식 고분과 유사한 고분 형태와 토기를 가지고 이주한 사람들이 고분을 축조하면서 섬 안에서의 독특한 생태적 조건에 적응한 산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고 하였다.
현재로서는 울릉도식 고분인 기단식 적석석실분의 축조집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울릉도식 고분은 구조상 당시 한반도에 분포된 고분과의 유사성도 있으나, 울릉도 고유의 특징이 강하게 담겨 있다. 이 고분들에 대한 정식 발굴 조사로 다른 지역과의 구체적인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