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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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陽里古墳群 |
영어의미역 | Tumuli in Namyang-ri |
이칭/별칭 | 남양리 고분군1·남양리 고분군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 737-1(지통골)·501(석문동)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희돈 |
성격 |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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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석실분|기단식 적석석실분 |
건립시기/연도 |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
높이 | 1.1~1.5m |
지름 | 10~13m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 737-1[지통골마을]|남양리 501[석문동마을] |
소유자 | 울릉군 |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고분군.
[개설]
남양리는 본래 골계[谷溪]로 불렸다. 골계는 비파산(琵琶山)[340m]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두 계곡에서 냇물이 흘러 내려 다른 마을보다 골짜기와 시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고대인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자연 지형을 갖추고 있다.
[위치]
남양리 고분군1은 서면사무소에서 남양천을 따라 약 70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남양2리 지통골 내 새마을회관 뒤편 밭과 산사면 일대에 있다. 남양리 고분군1에서 남양천을 따라 약 100m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서당마을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이 나온다. 길가에는 민가 4채와 남양리 동제당이 있다. 남양리 고분군2는 민가 북쪽 나지막한 능선 말단부에 밀집해 있는 고분 5기이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남양리 고분군1은 1957년 국립박물관의 조사에서 6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1998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 조사에서는 3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2001년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의 문화 유적 지표 조사에서는 7기의 고분을 새로 확인하였다. 7기의 고분은 남양2리 697번지 최상현의 집 뒤쪽에 1기[4호], 채상덕의 집 오른쪽과 우사에 각 1기[5·6호], 손병락의 집 서쪽 능선 남사면에 4기[7·8·9·10호]이다.
[형태]
남양리 고분군1의 4호분은 최상현의 집 뒤편의 자연 암반 밑 사면에 축조된 7.6m×10~13m에 이르는 대형 기단식 적석석실분이다. 석실 장축은 남북 방향이고 남쪽에 낸 도굴 구멍만 제외하면 구조가 비교적 완전히 남아 있다. 석실 남서쪽은 석축을 8~10단[2.3m] 쌓았으며, 동북쪽은 산 사면에 L자형으로 석실을 마련하였다. 석실 규모는 길이 6.6m, 상단 너비 0.6m, 바닥 너비 1.1m, 높이 1.4~l.5m이다. 측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내경하게 쌓은 후 개석과 봉석(封石)으로 덮었다.
5호분은 채상덕의 집에서 오른쪽으로 25m 떨어진 산 사면에 위치한다. 이 고분은 매몰되어 정확한 규모와 구조를 알 수 없다. 6호분은 채상덕이 우사(牛舍)를 지을 때 없앴다고 한 고분이다.
7·8·9호분은 손병락의 집 북쪽 해발 175m 지점의 산 사면에 위치한다. 규모는 8×7.5~7.8m의 평면 방형에 가깝고, 석실 장축은 등고선과 동일한 방향이다. 석실 입구는 바다가 보이는 방향이며, 현재 매몰된 상태이다. 석실 규모는 길이 6.7m, 상단 너비 8.4m, 바닥 너비 1.6m, 높이 1.3~1.15m로 대규모이다. 석실 벽은 서쪽과 남쪽은 경사지게 쌓아 올리고, 북쪽은 지면을 L자형으로 파서 내경하게 쌓은 후 개석과 봉석으로 덮었다.
10호분은 7호분에서 서쪽으로 약 150m 거리에 있는 해주최씨묘에서 북쪽으로 약 10m 떨어진 지점의 급사면에 있다. 규모는 7.5~8m×7.5~7.8m이며, 앞쪽은 경사지게 석축을 약 2.5m로 쌓고, 뒤쪽은 지면을 파서 석실을 마련하였다. 석실 규모는 길이 4.3m, 너비 0.8~l.2m, 높이 0.5~l.2m이며, 벽석은 내경되게 쌓고 개석과 봉석을 덮었다.
남양리 고분군2는 5기 모두 적석총으로 개석과 봉석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개석의 일부만 남아 있다. 고분들은 능선의 사면에 위치하며, 훼손이 심해 잔존 상태가 매우 불량하다. 앞쪽은 경사지게 석축을 쌓아 올렸고, 뒤쪽은 산 사면을 파고 벽석을 냇돌로 7~9단[1~1.3m] 정도 내경하게 쌓은 후 개석과 봉석으로 덮은 것으로 보인다. 고분의 장축은 대부분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는 남북 방향이다. 석실 규모는 길이 약 5~6m, 너비 0.7~1.1m, 높이 1~1.3m이다. 석실 평면은 장방형이나 일부는 모서리를 둥그스름하게 처리하기도 하였다. 석실 천정 위에는 길이 1.2~1.5m의 긴 판석을 개석으로 사용하여 덮었다.
남양리 고분군2의 석실 구조는 입구로 추측되는 산 사면 아래쪽의 단벽이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에 수혈식(竪穴式)인지 횡구식(橫口式)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봉석은 흙을 사용하지 않고, 크고 작은 냇돌을 석축한 것이 분명하나, 봉분의 정확한 규모나 크기는 알 수 없다. 경사면 아래쪽은 2~3단 또는 그 이상을 방형으로 석축하였고, 그 밖에 석실 주변은 타원형에 가깝게 석축한 것으로 보인다. 지형적인 특성에 맞추어 축조하였기 때문에 특이한 형태의 봉분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
유물은 고분 주변에서 병형(甁形) 토기의 저부편(低部片)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인화문 토기편 한 점이 채집되었다. 대각부(臺脚部)가 결실된 저부편에는 점열문(點列文)과 선문(蟬文)이 조합되어 찍혀 있다.
[의의와 평가]
남양리 고분군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울릉도식 기단식 적석석실분으로 산사면에 L자형으로 석실을 마련한 구조가 특징적이다. 특히, 최상현의 집 뒤쪽에 있는 4호분은 대형 고분으로 남쪽의 도굴 구멍만 제외하면 비교적 구조가 완전히 남아 있어 울릉도 고분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