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1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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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民間外交家-安龍福 |
영어의미역 | An Yong-bok, Nongovernmantal Diplomatist in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경래 |
[개설]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의회는 1905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군[隱岐郡] 오키노시마[隱岐の島]에 편입한 지 백 주년이 되는 2005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 제정을 강행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후 “독도를 돌려 달라”는 내용의 텔레비전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국서(國書)를 받아 낸 안용복으로 인해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유일의 민간외교관으로 불리는 안용복은 어떻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약을 일본 막부로부터 얻어낸 것일까? 부산 동래 출신의 평범한 어부였다는 안용복의 활약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왜구를 불러들인 울릉도 수토정책]
울릉도는 512년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후 다시 고려와 조선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1470년(성종 1)부터 조선 정부는 울릉도·독도에 대하여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추진하였다. 예부터 울릉도는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이 한 번 정착하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데다, 웬만큼 날씨가 좋지 않고는 육지 사람들의 왕래가 힘들어 조정에서 세금을 거두거나 관리를 파견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도망간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도 좋은 지형 조건에다, 대마도 인근의 왜인(倭人)과 해적들이 들락거리면서 조선의 선량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노략질을 일삼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불필요한 백성의 희생을 줄이고자 수시로 관리를 파견하여 불법 거주자를 소환하는 수토정책을 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울릉도에는 대나무와 자연 삼, 곧 산삼을 비롯한 각종 약초 등 천연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것들을 생업의 수단으로 삼아 채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조정에서도 조선의 백성으로서 주거가 목적이 아닌 생업을 위해서라면 울릉도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조선 정부의 울릉도 수토정책은 공교롭게도 일본 어민과 해적[왜구]들이 울릉도에 발을 들여놓기 쉽도록 하는 의외의 결과를 가지고 왔다.
수토정책 이후, 일본 어민들은 조선 백성이 없는 울릉도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조선정부 역시 울릉도에 관리를 상주시키지 않았으므로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 근해에서 물고기를 어획하거나 천연 자원을 남획해 가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일부 일본 어민들은 울릉도를 ‘천연 자원이 풍부한 무인도’로 생각하고 이를 도쿠가와 막부에 보고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울릉도를 시찰하고 돌아가기도 했는데, 당시 시찰 결과 무인도는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처음 일본으로 가다]
안용복은 당시 조일 교역을 위한 거점기지로 자리잡고 있던 동래부, 곧 지금의 부산시 좌천동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안용복은 젊은 날 좌수영의 능로군으로 있었다. 능로군이란 노를 젓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던 안용복은 1693년 능로군으로 군역을 마친 뒤 어민 40여 명과 함께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갔다가 그곳에서 일본의 오오야[大谷] 가문 어부들과 부딪쳤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오오야에게 ‘도해면허’를 주어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어로 활동을 하게 하였다.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항의하다 숫적인 열세에 밀려 일본의 오키시마[隱岐島]로 납치되고 만다. 18세기 일본 사학자 오카지마가 쓴 『죽도고(竹島考)』에 따르면, 당시 안용복은 서른여섯 살이었으며, 키가 작고 검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안용복은 오키시마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얼마 후 안용복은 죄인 신분으로 다시 요나코를 거쳐서 도쿠가와 막부로 끌려갔다. 일본측 문헌인 『통항일람』의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도쿠가와 막부의 조사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 불과 하루 거리이지만, 일본 땅에서는 닷새 거리이므로 분명히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안용복의 주장에 굴복한 도쿠가와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서계를 건네주고 풀어준다. 일본측 자료인 『인부연표(因府年表)』의 당시 기록에는 안용복을 송환할 때 호송사 두 명, 요리사 세 명, 병졸 다섯 명 등을 딸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용복은 송환 도중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다시 대마도에서 90일 동안 구금된다. 구금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송환된 뒤에도 안용복은 부산의 왜관에 50일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당시 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이 일본의 영토인 죽도(竹島)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다”고 서계를 위조하는 한편, “앞으로는 조선 어민이 일본 영토인 죽도에 침입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동래에 파견되어 있던 왜사(倭使)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을 통하여 조선의 조정에 전달하고, 안용복 일행을 동래로 호송시켰다. 대마도주가 서계의 내용을 뜯어 고쳐서 울릉도와 독도의 관할권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 근해로 북류하는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울릉도와 독도 부근으로 어로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동해 상에 울릉도 외에 따로 죽도라는 섬이 일본 열도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알아듣고는, 홍중하(洪重夏)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임명하여 동래의 왜관에 보내어,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며, 너희들이 말하는 죽도는 일본국 경내에 있는 한 섬으로 추정되는 바, 우리나라의 울릉도에도 현재 백성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하물며 그보다 멀리 있는 섬에 가기야 하겠느냐”라고 회답하였다. 그러자 다치바나 마사시게는 이 답서를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우리는 죽도에 관하여 말하는데 왜 울릉도를 들어 말하느냐” 하고는 답서 내용 중에 있는 ‘울릉도’를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치바나 마사시게로서는 조선이 울릉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상 울릉도를 빼앗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중하는 다치바나 마사시게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조정에서 보낸 답서를 그대로 전달하였다. 1694년(숙종 20)의 일이었다.
다치바나 마사시게는 별수없이 그 답서를 가지고 대마도에 들어갔지만, 몇 달 후 다시 가지고 나와서 답서 중의 울릉도에 관한 문구를 삭제해 줄 것을 재차 요구하며, 조선인의 죽도 출입을 금해 달라는 요구를 반복했다. 조선조정은 이때서야 조선이 말하는 울릉도와 일본에서 말하는 죽도가 동일한 섬임을 짐작하게 되었다. 분개한 조선 조정은 유집일(兪集一)을 접위관으로 임명하여 동래의 왜관으로 보내 왜사의 계략에 대응하는 한편, 장한상(張漢相)을 파견하여 울릉도의 지리와 자연환경을 조사케 하는 등 적극적인 대처에 나섰다.
동래에 도착한 유집일은 안용복으로부터 사건의 실상을 알아낸 후 동래에 와 있던 다치바나 마사시게에게, “조선의 울릉도와 너희들이 말하는 죽도는 하나의 섬에 붙여진 두 이름에 불과한 것으로, 울릉도는 엄연히 조선의 영토이다”라고 하면서, “울릉도를 방문한 조선인 안용복을 일본으로 납치한 것은 조선조정에 대한 명백한 침섭(侵涉)[침해와 간섭]이며 조선 백성에 대한 구집(拘執)[부당한 체포]에 불과하다”고 천명하고 울릉도에 일본인의 내왕을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다치바나 마사시게는 침섭과 구집이란단어를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유집일은 이를 거절하였다.
한편 장한상은 1694년 9월 19일에 울릉도로 출발하여 10월 6일 삼척으로 돌아와 조정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장한상은 “울릉도에는 주민을 거주시키는 것보다는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파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보고하였고, 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실행하기로 하였다.
[두 번째로 일본에 들어가다]
안용복이 일본에 들어갔다가 나온 이후 조선조정에서는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일본측의 간교한 계략에 단호히 대응하였고, 이에 1696년(숙종 22) 1월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 금지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대마도주는 여전히 울릉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는, 울릉도에 관한 4개 조항이 사실과 다르다고 트집잡으며 이를 동래의 왜관을 통해 우리 조정에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더이상의 대응은 하지 않았다.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외교전이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자, 당시 동래에 머물고 있던 안용복은 다시 울릉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울릉도에는 여전히 왜인들이 와서 고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안용복이 그들 중 한 무리에게 “울릉도는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어찌 월경 침범하여 고기를 잡느냐. 포박해서 끌고 가겠다”고 호통치자, “우리는 송도(松島)[독도] 사는 사람인데, 고기를 잡다가 우연히 여기까지 왔다”라고 발뺌하며 달아났다. 일본에는 송도라는 이름의 섬이 많은데, 급하니까 일단 송도라고 둘러댄 듯싶었다. 이에 안용복은 “너희들이 말하는 송도 또한 우산도(于山島)[독도]로서 우리나라 땅인데, 어찌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느냐” 하고 그들을 추격하였다.
이튿날 아침 안용복은 우산도[지금의 독도]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왜인들을 기습 공격했다. 왜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자, 안용복은 여세를 몰아 계속 추격하여 마침내 오키시마에 도착하게 되었다. 안용복의 두 번째 오키시마 방문이었다. 오키시마도주를 만난 안용복은, “내가 몇 년 전 이곳에 와서 울릉도와 우산도를 조선의 영토라 정하고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서계까지 받아 갔는데, 지금 또 왜인이 침입하였으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항의하며 따졌다.
오키시마도주는 호키주의 태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겠다고 하였으나, 며칠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안용복은 곧 배를 타고 호키주로 향했다. 안용복은 호키주 태수를 만나기 위하여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칭하고 사모관대에 검은 갓과 가죽신을 신고 가마에 오르는 한편, 일행에게는 말을 타게 하여 호키주의 성으로 들어갔다.
태수와 마주앉은 안용복은 “몇 년 전 두 섬의 일로 막부의 관백 서계를 받아 갔는데, 대마도주가 중간에서 서계를 위조하여 불법으로 두 섬을 침략하니 나는 막부의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주의 간상(奸狀)을 폭로하겠다”면서 동행한 이인성(李仁成)에게 상소문을 쓰게 한 뒤 도쿠가와 막부에 보내도록 하였다. 그때 에도에 있던 대마도주의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호키주 태수에게 그 상소문을 관백에게 올리지 못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호키주 태수는 울릉도 및 독도를 침범한 일본인들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고 안용복에게는 “두 섬은 이미 조선에 속해 있으니 다시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대마도주가 무리하게 침범할 경우 국서를 보내시오. 그러면 엄중히 처단하겠소”라고 약속하였다.
이에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이 사실을 비변사에 알렸으나, 조정에서는 함부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간에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안용복을 체포하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런데 다음 해 동래부사 이세재(李世載)가 대마도에서 온 왜사로부터 도쿠가와 막부의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관백이 보낸 서계 중에 “죽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일본인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내용을 통보받고, 대마도주 소 요시미치[宗義方]의 노고를 치하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죽도는 본래 조선의 영토이므로 특별히 치하의 서계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고는 남구만과 몇몇 신하들이 나서 안용복의 공을 변호하자 안용복에게 내렸던 사형선고를 취소하고 대신 귀양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후의 족적에 관하여]
민간인의 신분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문서화하는 등 울릉도·독도와 관련하여 큰 족적을 남긴 안용복과 관련한 기록은 거기에서 끝이 난다.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언제 죽어서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국가에서 해결하지 못한 중대한 국토 문제를 해결한 공은 3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빛을 발할 만큼 큰데도 도리어 귀양을 보내어 그후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으니, 실로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고암집(顧庵集)』에는 안용복이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안용복의 도일(渡日) 이후 조선조정에서는 2년에 한 번씩 울릉도와 독도를 순시하도록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안용복의 도일과 관련하여 사실을 기록한 뒤, “안용복은 영웅에 비길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