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12 |
---|---|
한자 | -峰土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원내동 마을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고용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2년 12월 9일 - 성틀봉 토성 터, 국립 나주 문화재 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시행 |
---|---|
소재지 | 성틀봉 토성 터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원내동 마을 성틀봉 |
성격 | 토성 터 |
지정 면적 | 약 190m[둘레]|약 1.7m[높이]|약 10m[폭]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성틀봉에 있는 토성 터.
[개설]
성틀봉(성틀峰) 토성(土城) 터가 자리 잡고 있는 시종면(始終面)은 신북면과 함께 백제 때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에 속해 있었다. 통일 신라 때인 758년(경덕왕 17)에 반나부리현이 반남군(潘南郡)으로 이름과 격이 달라지면서 큰 고을을 이루었다. 금정면 지역에 있던 아로곡현(阿老谷縣)이 야로현(野老縣)으로, 미암면·학산면·서호면 지역에 있던 고미현(古彌縣)이 곤미현(昆湄縣)으로 이름이 바뀌어 반남군에 속하였다. 고려 때인 1018년(현종 9)에는 반남현(潘南縣)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초기에 폐현되었다가, 조선 후기에는 반남면과 종남면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종남면이 영암군으로 편입되면서 영암 땅이 되었다. 1914년 북이시면, 종남면과 고려 말 진도 군민이 왜구의 침입으로 피난살이를 하던 명산면(命山面)이 통합되어 시종면으로 개편되고 2013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변천]
성틀봉 토성의 축조 시기는 토루(土壘) 내부에서 5세기 초중반쯤으로 판단되는 옹관(甕棺) 조각이 출토되었고, 성벽의 판축(版築) 기법[흙을 쌓아 성벽을 만드는 방법]과 규모가 백제 때의 토성에 비해 이전 방식인 점, 소규모의 보루 형태인 점, 그리고 성틀봉 토성 주변에 영암 내동리 쌍무덤[전라남도 기념물 제83호]과 영암 옥야리 방대형 고분군[전라남도 기념물 제84호]을 비롯해 다수의 5세기 무렵의 옹관 고분군이 산재해 있는 점으로 보아 5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성틀봉 토성 터는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원내동 마을 성틀봉에 있다. 성틀봉 토성은 주변 지역이 한눈에 보이는 해발 42m의 구릉 상에 위치하고 있다. 영산강으로 연결되는 지류 지역에 위치하여 해로 및 강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토성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성틀봉 토성 터는 1999년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할 때 존재가 확인되었고, 2012년 12월 9일부터 25일까지 국립 나주 문화재 연구소의 시굴 조사를 통해 판축 기법으로 축조된 토성의 구조와 축성 시기가 일부 밝혀졌다.
[현황]
성틀봉 토성은 성벽의 전체 둘레 약 190m, 높이 1.7m 내외, 폭 10m 내외의 토성으로서, 구릉 정상부를 둘러싼 까닭에 평면 형태는 둥근 꼴[圓形]을 이룬다. 성벽은 지표면을 다듬어 기초 공사를 한 후, 상부에 3~20㎝ 두께로 마사토와 점질토를 번갈아 다져 깔아 중심 토루를 만들고, 다시 황색사질 점토로 외피 토루를 덮어 축조하였다. 특히 중심 토루를 쌓아 올릴 때 판목(板木)을 고정하기 위한 영정주(永定柱)[나무 기둥]가 확인되었다. 영정주는 먼저 구덩이를 판 후 할석(割石)으로 받쳐 판축용 틀인 판목을 고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성벽은 구간별로 축조 방법을 달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사가 급한 구간은 판축 틀 시설의 기초를 단단하게 고정하기 위해 영정주가 박히는 부분에 구덩이를 만든 반면, 그렇지 않은 구간은 영정주만 세워 중심 토루를 축조하였다. 또한 북벽 중앙에는 성벽 상부에 화강암을 깔아 보호한 부분도 확인되었다. 성틀봉 토성은 1980년대부터 옹관 고분과 관련하여 주목되어 왔는데, 주변에는 영암 내동리 쌍무덤과 영암 옥야리 방대형 고분군을 비롯해 다수의 5세기경 옹관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의의와 평가]
성틀봉 토성은 5세기 무렵 옹관 고분 축조 세력과 관련이 깊은 판축 토성으로서, 고대 마한(馬韓) 세력 중 하나로 추정되는 영암 시종면 일대 세력의 거점성(據點城)으로 기능했던 사실을 학술 조사를 통해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영산강 유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대 판축 토성이자, 옹관 고분 축조 세력의 실체를 보여주는 거점성으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유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