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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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硏子- |
이칭/별칭 | 연자매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헌 |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둥글고 판판한 아랫돌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윗돌을 옆으로 세우고, 이를 소나 말이 끌어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는 방아
[개설]
연자(硏子)방아 는 연자매라고도 한다. 맷돌처럼 둥글게 다듬은 판판한 아랫돌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윗돌을 옆으로 세우고 나무 테를 씌운 다음, 한쪽 끝을 소나 말에 걸어서 끌게 하여 전체를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는 방아다. 육중한 윗돌에 눌려 안팎으로 밀려나는 곡식을 계속 욱여주며 돌리면 제풀에 잘 찧어지며, 특히 보리방아에서 능률이 높다. 한 사람이 마소의 고삐를 잡고 앞에서 몰고, 다른 사람이 그 뒤를 따르며 넉가래로 곡식을 뒤집어주는데, 이 사람을 ‘께끼꾼’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래 윗돌인 매는 해마다 쪼아 주어야 일이 쉬워지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을 ‘매조이꾼’이라고 부른다. 아래위 두 짝을 모두 쪼는 데에는 4~5시간 걸렸다고 하며, 삯으로는 쌀 한말을 낸다.
연자방아 로는 벼, 보리, 수수, 조 따위를 찧으며 밀을 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벼 한 가마의 겉곡을 벗기는 데에는 두 시간 이상 걸린다. 먼저 약 20분간 애머리 찧은 것을 풍구에 넣어 껍질을 날린 뒤에 다시 넣고 방아를 돌린다. 이와 같은 과정을 네 번 반복해도 알갱이가 현미인 채로 남으며 잘 대껴지지 않는다.
보리를 찧을 때에는 알곡이 부서지지 않고 겉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방아를 돌린다. 한 차례 돌리고 꺼내어 햇볕에 말리고 풍구에 넣어 껍질을 날린다. 다시 넣고 다시 말리고 하는 과정을 세 번 거듭해야 한다. 볕이 약해 얼른 마르지 않으면 여러 날 걸린다. 조는 두 번 거듭해서 찧으며 한 가마에 세 시간쯤 걸린다. 밀을 가루로 내는 데에는 한 가마에 한 시간 반쯤 걸린다.
보통 연자방아로 하루에 벼는 5~6가마[400~480㎏], 조는 3가마[240㎏], 밀은 5~6가마의 방아를 찧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아질을 하려면 방아는 물론이거니와 소도 있어야 하므로, 주인은 마소와 방아를 함께 빌려준다. 삯으로는 겉곡 한 섬 찧는 데에 알곡 한 말을 받았으며 연자방아 하루 사용을 사람의 이틀 품으로 잡기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연자방아 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것은 우리처럼 대형 윗돌을 세워서 돌리는 방식이 아니고 맷돌처럼 돌린 연자매였다. 우리의 옛 문헌에 의하면 연자방아[연자매]를 매, 연마(連磨), 연자(碾子), 전(輾), 석전(石輾) 등으로 표기하였고, 지방에 따라서는 경북 경산에서는 돌방아, 경기도 백령도에서는 돌방애 또는 연자간이라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자방아는 적어도 조선 시대 중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형태]
연자방아 의 아랫돌은 지름 170cm, 두께 50㎝ 이내로 땅바닥에 괸 돌 위에 얹혀 있으며, 안쪽이 우긋하도록 나무로 만든 테를 두르고 돌과 흙으로 그 주위를 덧쌓았다. 그리고 아랫돌 가운데에는 구멍을 뚫고 고줏대를 박아 윗돌이 그것에 의지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한편 고줏대는 힘을 많이 받아 흔들거리거나 빠질 수가 있으므로 아랫돌 아래의 아궁이처럼 뚫린 구멍으로, 역시 굵고 둥근 나무를 넣어 고줏대 밑구멍에 끼워서 고정시켰다.
윗돌은 지름 150cm, 두께 50㎝ 내외로 안쪽은 낮게 바깥쪽은 조금 높게 깎아서 언제나 안쪽으로만 돌아가게 하였다. 또 윗돌 양쪽 가운데를 우긋하게 파고 고줏대와 방틀에 의지하여 뺑이를 각각 박아 윗돌이 고줏대에서 함부로 이탈하지 않게 하였다. 윗돌 주위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방틀을 짜서 씌우고 그 한 끝을 마소에 잡아매도록 후리채를 달았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최일석(崔日錫) 씨 집 정원에 보존되어 있는 연자매는 아랫돌 지름 120㎝, 두께 42㎝, 윗돌 지름 112㎝, 두께 23㎝ 크기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영암 지역에서는 예전 연자방아를 마련하여 방앗간에 안치하고 나면 간단한 음식을 방아 고줏대 앞에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촛불을 밝힌 앞에서 주인은 절을 올리고 여주인은 연자방아가 가정에 재수를 일으키고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게 해 달라고, 또 아무 뒤탈이 없도록 도와 달라고 축원을 하였다. 이러한 것은 당시 연자방아가 매우 중요하였음을 시사한다.
연자방아 한 틀을 제작하는 데에는 보통 한 달 가량이 걸리고 비용 또한 많이 들어서 일반적으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련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연자방아의 설치와 운용은 ‘제’ 혹은 ‘접’이라는 계(契)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연자방아를 신설할 필요를 느낄 때 이웃끼리 의논하여 연자방아 계를 조직하여 연자방아 설치와 운용을 위한 경비와 노력 부담도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연자방아는 한갓 방아 기구로서 그치지 않고 민간 결속의 상징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