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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일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144
한자 麗水日報
영어의미역 Yeosu Daily News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유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역신문
관련인물 조종응|신양남|김원배|박병한|김채주
창간인 정재완
발행인 정재완
판형 타블로이드(8절)
창간연도/일시 1947년 11월 1일연표보기
종간연도/일시 1961년 5월 23일연표보기
발행처 여수일보사
발행처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에 있던 여수일보사에서 발행했던 일간 신문.

[창간경위]

『여수일보』가 창간되던 때는 좌우익 갈등으로 국론 분열과 사회 혼란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 하에서 주권과 민족주의 운동이 강하게 일던 시기였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창간인 정재완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여수군지부장, 여수군수, 전라남도 사회교육과장 등을 역임했다.

공직 생활을 그만 둔 뒤 지방 언론기관을 만들고자 낙향하여 주주 15명과 함께 『대중일보』를 매입하여 1947년 8월 1일 대중신문사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창간 주요 멤버로는 사장 정재완, 편집국장 조종응, 차장 신양남, 총무국장 김원배, 기획국장 박병한, 업무국장 김채주 등이 있으며, 사옥은 중앙동 ‘월세계’ 다방 자리였던 목조 건물 2층에 마련했다.

[형태]

당시의 인쇄소의 시설은 열악한 형편이었다. 『여수일보』는 여수공예사의 주선으로 4페이지를 발간할 수 있는 평판 인쇄기 1대에 활자(2호, 4호, 6호)와 조판 시설을 갖추고 모두 수작업으로 신문을 만들어 냈다. 편집 형태는 타블로이드(8절 크기)로 전라남도 동부 6군을 대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1948년 1월1일 『대중신문』에서 『여수일보』로 제호를 바꾼 뒤에도 지속되었다.

[구성/내용]

지면이 4면이어서 많은 소식을 싣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여수일보』는 당시 1면에 정계를 비롯한 중앙 소식을 실었는데, 무전을 통해 합동통신사로부터 직접 소식을 받았다. 『여수일보』 여수지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기사를 자주 실었고 민족주의적 논조를 고수하였다.

[변천과 현황]

1947년 8월 1일 대중신문사로 출발했던 『여수일보』는 5개월 뒤인, 1948년 1월 1일자로 제호를 변경했다. 『여수일보』는 여수 지역만이 아닌 인근 순천 등 동부 6군으로 그 보급망이 확대되었으며 특히 순천과 광주의 독자 수가 월등히 많았다.

1948년 『여수일보』는 여순사건으로 수난을 겪게 된다. 여순사건을 주도한 주요 세력인 남로당 여수군당은 신문사를 접수하고 『여수일보』의 발간을 중지시킨 채 『인민보(人民報)』를 발간토록 한다. 이후 연합군의 토벌 작전으로 여수일보사는 불에 타고 주주들은 이재민이 되어 복간이 지연되다가 1949년 5월 15일 속간되었다.

수정동 공장 창고에 사무실을 마련한 여수일보사는 본문 활자(6호)를 뺀 나머지 전체 인쇄 시설을 인쇄공예사에 의존하게 된다. 속간 이후 9개월 운영이 지속되다가 1950년 2월 인쇄를 맡았던 인쇄공예사와의 이해관계로 발간이 중지되고 활판 인쇄로 전환한 뒤 2개월 간 발간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발간이 중지되고 같은 해 10월 『여수일보』의 재건을 위해 여수 관문동 태화수 자리에 사무실을 마련한다. 1951년 5월 주주들의 협조로 활자와 무전기 등을 다시 마련하여 정상적으로 『여수일보』를 발간하는데 성공한다.

1956년 10월,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여수일보』 창간 10주년을 기해 작곡가와 가수 등을 초정한 전국노래자랑대회를 개최하고 경영진들도 재배치하는 등의 자구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갈수록 내분이 심각해졌으며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5월 2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11호에 의해 폐간되었다.

내홍을 겪으면서 폐간 직전 『여수일보』에서 나온 편집차장 김내휴는 1961년 3월 당시 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박병호와 함께 『여흥일보』를, 『여수일보』 출신 신양남은 1961년 3월 『여순신보』를 발행하면서 『여수일보』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신문이 다른 지역에서 여수까지 열차로 배달되는 시간은 서울에서 13~14시간, 광주에서 6시간 정도였다. 『여수일보』는 중앙지나 지방지보다 빠르게 독자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타블로이드 크기로 4면을 발행하는 『여수일보』는 같은 크기로 2면만을 발행하는 당시의 전국 신문들보다 내용면에서도 경쟁력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여수일보』는 미군정 하에서 사회 혼란의 주요인이 되었던 좌우익의 갈등과 압력에 휩쓸리지 않고 민족주의적 논조를 고수하였다. 또한 『여수일보』는 수산업이나 상업에 치중된 지역경제, 그리고 여수가 호국문화도시임을 감안해 자긍심을 심어주는 기사를 자주 실어 해방 후 여수 지방의 격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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