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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206
한자 新聞
영어의미역 Newspaper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유삼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발간되는 시사적인 뉴스나 정보·오락·광고 등을 제공하는 정기 간행물.

[개설]

신문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광의의 신문과 협의의 신문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광의의 신문은 신문사가 정보를 수집·처리·제작하여 신문지라는 대중 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한 대가를 받는 공공성과 기업성을 함께 지닌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며, 협의의 신문은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하나인 신문지를 말한다.

신문의 종류에는 발행 주기에 따라 일간지·주간지·순간지(10일 기준)·월간지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기능과 목적에 따라 일반주간신문·특수주간신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또 배포 범위에 따라 전국지와 지방지로, 발행 목적으로는 상업지와 기관지로, 대상 독자들의 관심 영역에 따라 종합지와 전문지, 사용 언어에 따라 모국어지와 외국어지로 나눌 수 있다.

또한 대가성에 따른 유가지와 무가지, 발행 부수에 따라 대·중·소 3단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신문의 특성은 발행의 정기성, 기계적 복제성, 대중의 접근성, 내용의 다양성과 시의성, 발행의 계속성 등을 들 수 있으며, 기능은 보도 기능, 지도 기능, 계몽 기능, 오락 기능 및 광고 기능 등을 들 수 있다.

[변천]

1. 해방 전후

1883년 발간된 『한성순보(漢城旬報)』나 이를 이은 『한성주보(漢城週報)』, 그리고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이 여수 지역에 어떻게 보급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나 판단할 정황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1920년대는 소위 문화 통치라는 미명 아래 창간되었던 『동아일보(東亞日報)』·『조선일보(朝鮮日報)』·『시사신문(時事新聞)』 등은 여수 지역에 보급망을 갖추고 특파 기자까지 주재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들 언론들은 전국적인 매체로 여수 지역과 연계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여수 지역 언론의 시초는 1945년 8월 해방 이후 박병호(朴炳昊)가 발간한 일간지 『대중보(大衆報)』와 이진문(李珍文)이 여순사건 직전까지 주간으로 발간한 『해방시보(解放時報)』이다. 특히 박병호는 해방 전에 중국으로 건너가 천진(天津)에 있는 『몽강일보(蒙彊日報)』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해방 후 고향땅에 언론 기관의 싹을 심었다.

『대중보』는 처음에 8절 크기 프린트물로 발행되다가 1년 뒤에는 인쇄공예사와 제휴하여 타블로이드판에 활자 인쇄로 발행하게 된다. 이어 1946년 11월 1일에는 미군정청에 정식으로 등록(A25호)하여 1947년 6월에 이르러 합법적인 신문의 자리를 굳혔다.

해방 전의 독립 투사로 활동하다 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추진위원장을 거쳐 여수군수를 맡았던 정재완이 『대중보』 사장 박병호와 합병에 합의를 하게 된다. 이에 1947년 8월 1일 주주 15명으로 주식회사 대중신문사가 출범하게 되었고 『여수일보』라는 제호로 타블로이드판 4면을 발행하게 된다.

『여수일보』의 보급망은 주로 여수·순천·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6군에 집약됐으며 수산업이나 장사에만 치중되어 왔던 여수 지역의 전통과 문화 도시로서의 긍지를 심어 주고 도시의 격을 높여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발생 이후에는 남조선노동당 여수군당에 접수되어 『인민보』를 발행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심각한 내분으로 정간과 속간을 거듭하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5월 2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고시 제11호에 따라 시설 미비를 이유로 폐간되었다.

2. 1960년대

『여수일보』 내분이 한창일 때 당시 여수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박병호는 『여흥일보』를 창간하였다. 또 『여수일보』에 몸담았던 신양남은 1961년 3월부터 주간으로 『여순신보』를 창간하였는데, 여기에는 『여수일보』 인쇄 시설을 인수한 김용섭과 과거 『여수일보』 구성원들이 대부분 참여하였다.

이렇게 하여 자유당 정권 말엽에 『여수일보』와 『여흥일보』의 공존 시대에서 『여흥일보』와 『여순신보』 공존 시대로 재편됐으나 이 기간은 겨우 몇 개월로 끝나고 말았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두 신문이 모두 등록 취소되어 여수 지방에는 말 그대로 무신문(無新聞) 시대가 되고 말았다.

1965년에 이르러 언론 규제가 완화돼 특수지에 한해 등록이 허용됐는데, 신문에 집념이 강했던 박병호는 그 해 6월에 주간 『여수경제신문』을 타블로이드 4면으로 창간하게 되었고, 1966년 1월부터 『새한경제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였다. 그러나 『새한경제신문』도 몇 달 안 돼 폐간됐다.

박병호는 다시 1966년 7월 1일 주간 타블로이드 4면으로 『여순산업신보』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1975년 12월 박병호는 박종대에게 『여순산업신보』를 인계하였고 2년 뒤인 1977년 12월에 다시 김정수, 김충조 등이 넘겨받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열악한 신문 환경과 경영 악화를 견디다 못해 『여순산업신보』는 1,070호를 끝으로 1980년 7월 31일 폐간되고 만다.

3. 1980년대 이후

1980년대 군사 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의 역사까지 숨길 수 있을 만치 통제가 심했던 터라 여수 지역에는 신문사가 있을 수 없었다. 1980년대 말 언론 규제가 완화되면서 여수에도 정정균 공인회계사를 대표로 한 일간지 『한남일보』가 1년여의 준비 기간 끝에 1990년 6월 창간되어 사옥과 윤전 시설을 자체적으로 갖추었다. 편집국 기자 40여 명을 포함해 100여 명이 근무했으며 매일 8면 배판으로 발행되었다.

취재권역 역시 여수시·여천시·여천군만이 아닌 순천·광양·구례·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권역으로 확대했고 중앙이나 도 단위 기사와 사진은 통신사 도움을 받아 실었다. 하지만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한데다 광고 수입 저조, 지역 언론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경영이 악화돼 창간 후 1년을 조금 넘긴 1991년 9월 폐간되고 말았다.

『한남일보』의 폐간은 이후 여수 지역 언론이 처한 상황을 재인식시켜 주었다. 우선 일간지는 수익성이 떨어져 생명력이 길지 않다는 점과 지역 신문이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수입이나 독자층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의 문제가 핵심이었다. 때문에 이후 출범한 신문 대다수가 주간지로 발행하게 되는데, 독자층도 출향인들을 대상으로 고향 소식을 전하거나 마을 구석구석 소식을 전하는, 말 그대로 지역과 생활 뉴스를 다루는 신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한남일보』 폐간 이후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지역 소식은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한려신문』·『까치정보』·『교차로』·『벼룩시장』 등 정보 신문을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들 정보 신문들은 타 지역과 달리 1면~8면씩 지역 뉴스를 다뤘는데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무가지인데다 매체마다 적게는 1만 부에서 많게는 3만 부까지 매주 2회~5회까지 발행했으니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들 정보 신문사들은 자체적으로 기자들을 2~5명까지 두고 신문을 발행했으며 기사 강도에 따라 광고량이 달라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심지어 이들 정보 신문사들은 정보 신문이 특수지여서 논제에 대한 시사나 논평에 제약이 따르자 다투어 일반주간신문으로 재등록하는 상황까지 빚게 된다. 출향민을 대상으로 한 『여수반도신문』, 한려정보신문사에서 발행하는 『한려신문』, 까치정보사에서 발행하는 『까치신문』, 교차로정보신문사에서 발행하는 『교차로 저널』 등 4~5개의 지역 신문이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발행된다. 이들 지역 신문들은 1990년대 말 경영상을 이유로 기자들을 해고하거나 생활 중심 뉴스만을 다루는 순수 정보 신문으로서의 기능으로 전환하면서 여수 지역 신문은 또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타블로이드판 크기의 정보 신문이 독자들에게 익숙해지자 1999년 12월 『진남신문』(발행인 김유삼)이 주 2회 24면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무가지인데다 광고도 정보 신문에 밀려 창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새로운 경영진으로 넘어가 『여수저널』로 제호가 바뀌어 발행되었다.

또 교차로정보신문사에서 2001년 6월 『여수투데이』라는 일반주간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2년 발행되다 2003년 6월 폐간되었다. 다만 출향인들을 대상으로 발행했던 『여수반도신문』만이 『삼려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다시 현재의 『여수신문』 등으로 제호를 바꾸며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이들 여수 지역 신문사들의 수익성은 영세성을 면치 못했다. 지상파·공중파·케이블TV·중앙지·지방지 등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데다가 인터넷 매체까지 언론 대열에 합류했으니 구독과 광고 수주 환경은 갈수록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여수 지역에는 윤전기 시설이 전무한 상태여서 지역 신문 대부분은 광주에서 인쇄를 해 오고 있는 등 간접 비용 지출 역시 만만치 않은 상태이다. 때문에 2000년대를 전후해 발행됐거나 현재 발행되고 있는 여수 지역 신문 대다수의 발행부수도 3,000~5,000부로 많지 않았고 개인 독자보다는 관공서 위주의 거점 배포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현황]

2007년 말 기준으로 여수 지역에는 『여수신문』·『새여수신문』[현재의 『남해안신문』]·『여수로신문』·『남도문화저널』·『동부매일』이 발행되고 있으며, 인터넷으로 『여수인터넷뉴스』·『여수닷컴』·『브레이크뉴스』가 발간되고 있다.

2007년 말 현재 여수 지역에서 주재 기자가 상주하고 있는 매체는, 지방지의 경우 『광주일보』·『전남일보』·『전남매일』·『광남일보』·『무등일보』·『남도일보』·『광주매일』·『호남매일』·『호남일보』·『대한일보』·『전남도민일보』·『전광일보』·『아침신문』 등 13개지가 있으며, 방송사와 통신사의 경우, 연합뉴스·뉴시스·KBS·MBC·KBC·CBS·DBS 등 7개사가, 전국일간지는 『경향신문』·『신아일보』·『전국매일』·『시대일보』·『아시아일보』·『해동일보』·『서울일보』·『내외일보』 등 8개사의 신문들이 있다.

이와 함께 다섯 개의 여수 지역 신문과 세 개의 인터넷 매체까지 합쳐 40여 개의 매체, 50명이 넘는 기자가 여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어 여수 지역민들은 정보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의의와 평가]

전국 모든 지역 신문의 한계이겠지만, 여수 역시 많은 지역 신문들이 지역민의 대변자임을 자청하고 나서지만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과, 취재나 편집을 담당할 인력이 부족해 오랫동안 지역민과 호흡할 수 있는 지역 신문이 자리 잡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최근 언론 규제가 완화되면서 전국이나 지방 단위 신문 창간이 줄을 잇고, 각 신문사 주재 기자들이 여수에 상주하게 되는 상황에서 순수한 여수 지역 신문들이 경쟁력을 갖고 계속 발행될 수 있을지, 또한 지방자치 시대 진정한 대변지로서의 기능을 잘 해 낼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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